<애도의 조건>은 나름의 삶을 살아온 한 어머니가 이태원 참사로 딸을 잃으며 ‘애도의 조건’을 되묻는 이야기입니다.
이태원 참사에 대해 “나도 저곳에 있을 수 있었다”라며 공감하는 20대 청년들이 있는 반면,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코로나가 잠잠해진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 경각심 없이 사람 많은 곳에 모여 코스튬이라 부르는 옷을 입고 외국 명절을 즐기려 한’ 사람들—이들은 한국 사회의 애도를 받기엔 부족한 조건을 지닌 듯 보입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살아온 궤도가 다르기에 각자 다른 이유로 공감하거나 혹은 공감하지 못합니다. 이것은 이상적이지도 바람직하지도 않지만 보편적인 현상입니다. 모든 사람에겐 각각의 ‘우리’라는 범주가 있습니다. 그게 지구 차원으로 넓을 수도 있고 국가 차원의 범주일 수도 있으며 내 가족만, 나만 아니면 된다는 식의 좁은 범주일 수도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종교, 취향, 나이에 따라서도 나눕니다. 그것이 선천적이든 사회 현상에 의해 후천적으로 만들어졌든, 각자의 마음 속에 각각의 범주가 실재한다는 사실은 뜯어 고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이태원 참사는 여러 조건으로 인해 많은 이들의 공감의 범주, ‘나’의 범주, ‘우리’의 범주에서 벗어나버렸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그 조건을 무기삼아 휘두르며 여러 유형의 2차 가해를 일삼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참사의 피해자들에게 가해적인 말을 얹는 것과 자신이 공감할 수 있는 참사의 범위가 좁은 것이 아무 관계가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자신이 어떻게 ‘우리’ 혹은 ‘나’를 범주화하고 있든간에 이미 사회의 보편적인 ‘우리’라는 범주는 존재합니다. 서로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서로 보고 들을 수 있는 공간에서 피해자들에게 상처를 주는 말을 하는 것은 사회성의 문제입니다. 노력하면 무엇이든 될 수 있다고 믿으며 개인의 의지력을 강조하는 대한민국에서 타인의 내면을 살피지 않고 막말을 뱉는 것을 참지 못하는 현상은 모순적입니다.
이 만화에는 죽은 딸을 애도하지 못하는 이유들이 여럿 등장합니다. 어머니가 살아온 삶 때문이기도 하고, 그것과 절묘하게 맞물린 딸의 행동들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런 딸을 애도 가능한 범주에 넣을 수 없었던 어머니와, 참사 밖에 서있는 우리가 과연 다른가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만화로 보이기를 바랍니다. 어머니는 작품 후반부에 이르러 딸을 애도하길 선택하게 되는데 그 선택에는 어떠한 조건도 존재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