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Q. 얼마나 힘든 시간과 고통을 경험하셨을지 헤아리기조차 어렵습니다. 가족분들을 수습하신 뒤에 일상은 어떠하셨는지요.
A. 사실 저는 아직도 일상으로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그날 이후 돌아온 적이 없습니다. 참사 직후부터 대구시 시민회관에서 노숙 생활로 1년, 대책위원회 사무실에서 1년을 보냈습니다. 운영하던 컴퓨터 학원도 처음에는 다른 강사들에게 맡겼다가 접었습니다. 대구지하철 참사 희생자 대책위원회의 활동이 제 전업이 돼버렸지요.
시신을 찾은 뒤에 직장이든, 일상이든 돌아가신 분들도 계십니다. 밖에서 보면 그분들이 일하고 일상생활을 하는 것처럼 보일 겁니다. 하지만 사실은 누가 밥을 먹으라 해서 밥을 먹고 피로에 지쳐서 겨우 잠을 잤을 겁니다. 친구든 친척이든 주변 사람들이 이젠 잊어버리고 제대로 좀 살라고 말을 하면 대답은 알겠다고 했겠지만 그렇지 못하고 살았을 겁니다. 그게 참 잘 안 됩니다.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는 말이 이해됩니다. 우리 딸이 살아있었으면 지금 스물아홉입니다만, 저는 일곱 살까지의 기억밖에 없어요. 스물아홉이면 사회생활도 하고 애인도 생기고 그랬을 나인데 오로지 제 상상뿐인 거죠. 아이가 어렸을 때 제가 학원에서 퇴근해서 느지막이 오면 딸 아이가 밥 먹는 제 무릎에 앉아서 애교를 떨었어요. 오늘 어린이집에서 이랬다, 저랬다… 말은 좀 느렸지만, 종알종알 이야기했어요. 아직도 딸 생각만 하면 무너져요. 참사 초기에는 그때 무릎에 앉아 있던 딸의 무게를 느꼈었는데 이제는 다 그 무게를 느낄 수가 없어요. 잊고 싶지 않은데도 다 잊히더라고요…
제일 싫은 게 저 혼자 제사를 지내는 겁니다. 제삿날만 되면 신경질이 팍팍 납니다. 아내랑 둘이서 잘 때 “당신은 나보다 하루 오래 살아라, 내가 먼저 죽을 테니 내 뒤처리하고 죽어라.” 그렇게 내가 농담하면 아내가 “내가 먼저 죽을 거다, 당신이 다 처리하고 죽든지 살든지 장가를 가든지 말든지 그렇게 해라”고 그렇게 장난을 치곤 했었는데, 제가 왜 내 아내 제사를 지내야 하는지…. 문득문득 아내 생각이 납니다.
친구들을 만나서 밥도 먹고, 이야기도 하고, 농담도 합니다. 하지만 사람들 눈치가 보여요. 맛있는 음식을 먹으러 갔는데 옆 테이블에 아는 사람이 있으면 ‘자기 아내, 자기 새끼 잃어놓고 밥 잘만 먹네’ 그런 생각을 할 것만 같습니다. 자동차가 고장이 나서 바꾸는 데도 그것조차 눈치가 보이는 거예요. ‘내가 죄인이다…’ 저 자신이 그렇게 보입니다.
우리 아들이 참사 당시에 초등학교 5학년이었어요. 지금 서른두 살인데 지금까지 22년간 참사에 대해서 한 번도 대화해보지 않았습니다. 아들에게 사고가 났을 때 ‘네 엄마와 동생이 대구지하철 화재참사로 죽었다’라고 이야기를 꺼냈어요. 울 줄 알았는데 울지도 슬퍼하지도 않고 그냥 가만히 있더라고요. 대구지하철 화재참사에 신경을 많이 쏟다 보니 아들에게는 신경을 많이 써주지 못하고 키웠습니다. 제가 대구지하철 화재참사로 만들어진 2.18안전문화재단 사무국장으로도 활동했었습니다. 재단에 있으면서 추모 사업을 하면서 대구시와 부딪치다 보니 시청 안에 들어갔다가 경찰들에게 들려 나오기도 하고, 그런 일들이 잦았습니다. 아들을 생각하면 미안하지만 그때 제게는 그 일들이 더 중요했던 것 같습니다.
혼자 컸는데 아들이 말썽부리지 않고 잘 커 주어서 고맙습니다. 하지만 주변에는 말해도 아들에게 미안하다, 고맙다는 말을 직접 해주지는 못했습니다. 아들도 나름대로 생각이 있겠지만 꺼내지 않고 있을 거고요. 아들과 참사 관련한 이야기를 나누고 풀어야 한다는 전문가들의 조언을 들었습니다. 그렇지만 솔직히 아들이 무슨 말을 할까 생각하니 무섭습니다.
이 괴로움과 고통을 지고 사는 것이 어쩔 수 없는 업보라고 생각합니다. 어쩔 수 없이 닥친 일이고 기억 속에서 지울 수도 없는 일이죠. 가까운 사람들도 모두 잊고 생업을 하든 다른 걸 해보라 하지만 기억은 결코 사라질 수 없습니다. 모든 유가족이, 특히 자식을 잃은 사람들은 가장 절박하게 잊지 못하고 삽니다. 그만큼 갑작스러운 죽음과 참사가 유가족들에게는 너무 힘듭니다.

(이다원. 청강문화산업대학교. 2025. 기억의 그리움)
Q. 사회적 기억을 남기기 위해 시도된 추모 문제가 아직도 해결되지 못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대구지하철 화재 참사 희생자들을 위한 추모 묘역과 시민들을 대상으로 한 안전 교육을 할 수 있는 추모관을 한 곳에 만들어야만 한다는 게 우리의 주장입니다. 솔직한 심정으론 저도 제 아내와 딸을 경치 좋은 곳에 묻고 싶은 생각이 절박합니다. 그런데도 그러지 않은 건 우리 사회가 참사를 기억하지 못하면, 교육하지 못하면 이런 죽음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기 때문입니다.
저희가 그 추모 사업 조성지만 다섯 번을 옮겼습니다. 맨 마지막으로 결국 팔공산 자락으로 왔는데 관광지 주변이라 지정 당시부터 지금까지 주변 상인들과 땅 주인들의 반대가 심합니다. 그 과정에서 대구시의 행태에 문제가 많았습니다. 인근 주민들에게는 추모시설이 들어오지 않는다고 문서를 써줬고, 우리에겐 주민들이 반대하니 먼저 시설을 만들어놓고 다음에 공식화하자. 또 유가족들에게 대구시 담당자들과 소방본부 담당자들이 CCTV를 돌려놓을 테니 주민들이 모르게 와서 먼저 희생자들의 유골을 매장하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추후에 문제가 되자 한 입으로 두말을 한 적도 없고, 가족들에게 공문서도 준 적도 없고, 유가족들이 몰래 독단적으로 한 짓이라며 발뺌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대구시민안전테마파크라는 이름이 아닌 이곳이 2.18 기념공원으로 공식 명명될 수 있도록, 여기에 묻힌 유해가 수목장의 형태로 안식에 들 수 있게 해달라고 요구 중입니다. 이것이 공식화되지 않으면 몸만 있고 이름이 없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희생된 분들이 이곳에 있고, 이곳이 추모지임을 공식화하고 싶습니다.

(권은비, 2024, 21주기 2.18대구지하철 화재참사 추모식장 전경)
그래서 긴 시간이 흐린 지금까지도 대구시와 우리 희생자 가족들 간의 소송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대구시는 권력이 있는 집단이고, 우리는 힘없는 사람이다 보니 법정 싸움이 쉽지는 않습니다. 팔공산에 추모시설을 조성하기 위해 대구시에서 찾아와 대화 나눈 녹취록도 다 남아 있습니다만 공문서가 없어 법적으로 인정이 되지 않고 있어요. 시가 반대 행동을 부추겼다는 증언도 있습니다. 어떤 분은 동사무소에 쓰레기를 버리려고 갔는데 ‘추모 공원 절대 반대’라는 문구로 피켓을 만들고, 플래카드를 걸고 사람을 모아서 구체적으로 반대 행동을 하라고 쓰여 있는 종이를 발견했다고 알려주시기도 했습니다.
Q. 정말 힘들고 지내오셨을 것 같은데, 유가족들 간에는 어떻게 지내시는지 궁금합니다.
A. 저는 한동안 2.18 안전문화재단 사무국장으로도 활동했는데, 유가족의 이야기를 대구시에 전달하고 항의도 하는 상황이다 보니 중간에서 스트레스도 컸습니다. 제가 마흔한 살에 참사를 겪고 올해 예순셋인데, 유가족 중에는 젊은 편입니다. 스무 살, 서른 살의 자식을 잃고 지금 70대, 80대가 되신 분들도 계십니다.
그분들로부터 원망이나 항의도 듣습니다.
“너 대체 뭐 하고 있느냐, 추모 공원 만든다고 한 지가 몇 년인데…. 나 죽기 전에 해내라, 해 낼 수 있겠냐?”
저도 한다고 시에 가서 싸우고, 욕도 하고, 문도 두드려 부수고 하는데, 이게 진척이 안되다 보니까 그런 말씀들을 제게 하세요.
한 분은 암에 걸리셨는데, 어느 날 밤중에 제게 전화하시더라고요.
“나 죽기 전에 추모 공원 되는 것 볼 수 있겠냐.”
그러고 나서 한두 달 뒤에 돌아가셨어요. 그 통화를 한 나만이 그 사실을 알고 있는데, 그걸 기억하고 있는 게 굉장히 마음이 아파요.
사실 내 가족이 죽은 것도 제 마음에서 처리를 못 하는데 다른 유가족들의 이야기도 들어야 하고, 이렇게 살아야 하느냐 하는 생각에 스트레스도 받고 굉장히 힘듭니다. 한 2년 전부터는 모든 게 다 귀찮고, 잘못하면 내가 진짜 죽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좁은 캐비닛 속에서 움직이지도 못하는 느낌이었어요. 견디려고 해도 견뎌지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참사에 대한 모든 걸 잊어버리고 싶어서 손을 떼겠다고 말하고 김천에 내려와서 전화도 받지 않고 살았습니다. 그러다 6개월 전부터 다시 조금씩 사람들을 만나고 있습니다.
유가족들이 대구시와 오래 싸워왔지만, 사람이다 보니 많이 지치고 생각이 희미해질 수도 있죠. 실제로 대구시에 뭔가를 기대하고 협조하며 자리를 받는 사람들도 있었어요. 탄압받기도 하고요. 자꾸만 안 좋은 일을 경험하다 보니 유가족 대표로 활동하는 이들이 허약해져서 넘어가면 어쩌나 불안할 때도 있어요. 하지만 지금까지 역할을 잘해주고 있어서 고맙습니다. 저도 잘 협조해 주기 위해 노력하고, 미안한 것도 많습니다. 이렇게 유가족들은 서로 믿고 의지하기도 하고, 원망하고 감시하는 사이기도 합니다.

Q. 마지막으로 시민들에게 바라는 점,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A. 유가족들이 가장 바라는 것은 왜 유가족들이 이런 이야기를 하는지 귀를 기울여주는 것입니다. 우리 유가족들은 누가 시켜서 움직이는 존재들도 아니고, 스스로 생각해서 말합니다. 그러나 언론은 한쪽만을 비출 때가 많아요. 그러니 한 번만 더 곱씹어보고, 요즘에는 인터넷도 발달했으니, 검색이라도 해서 제대로 알아보고 스스로 생각해줬으면 좋겠습니다. 어떤 행동에 동참해 준다면 좋겠지만 그게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저 듣고 넘어가지만 말고, 상세하기 질문을 하든, 전화를 하든, 유가족의 말을 들어보려고 시도했으면 좋겠습니다. 이미 자기가 가진 생각만 더 견고히 하면서 몰아가지 않기를 바랍니다.
지금도 솔직히 내 아내와 딸을 나만 생각하고 슬퍼하면 되지 다른 사람이 함께 슬퍼해 주기를 바라지는 않습니다. 그런데도 언론에 대응도 하고 이런저런 활동을 하게 된 계기가, 한 방송국 기자가 아내와 딸에게 영상으로 편지를 써달라고 한 일이 있었습니다. 제가 아내와 딸을 동시에 잃어서 사연이 특별히 슬프다고 생각했는지 방송국에서 카메라를 많이, 아주 바짝 가져다 댔습니다. 많은 사람의 마음을 흔들 수 있겠지만 언론으로서 특히 유가족들에게 잘못된 행위입니다. 하기 싫다고 욕도 했었는데, 유가족분들이 힘든 건 알지만 언론에 그렇게라도 나와야 다른 사람들이 우리 유가족들이 바라는 게 무엇인지 알 수 있지 않겠느냐 설득하셨습니다. 당시에 유가족들을 폭도처럼 비추는 언론이 워낙 많았으니까요. 그 말씀들에 동의가 되더라고요, 저도 너무 답답했고요.
결국에 촬영은 했는데, 후에 담당 PD가 전화해서 “죄송하다, 저희 생각만 하고 선생님 생각을 안 했습니다. 내보내지 않겠습니다.” 그렇게 사과하고 방송에도 내보내지 않더라고요. 그때 이런 사람도 있구나, 우리 이야기를 전달하면 안 좋게 바라보는 사람도 있어도 이해하고 제대로 받아들이는 사람도 있다고 생각하게 되면서 저를 바꾸게 되었죠.
사실 참사에 대해서 말하는 것도 마음이 힘들고 솔직히 싫습니다. 하지만 여러분들이 알아줬으면 좋겠다는 마음도 있습니다. 안전에 대해 다시 생각하고 또 결정권자가 된다면 우리와 안전을 생각하는 사회로 바꿔줬으면 하는 바람도 가지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대구지하철 화재참사 희생자들과 유가족이 있어 사람들이 조금 더 안전한 세상에 살고 있다는 것도 알아줬으면 좋겠습니다. 대구지하철 화재참사의 영향으로 전국에 있는 지하철 내장재가 모두 불연재로 바뀌었습니다. 참사가 일어나기 전에 그런 변화가 있었으면 좋았겠다고 생각은 하지만 그래도 참사 피해자들의 희생으로 누가 불을 일부러 내도 번지지 않는 그런 세상에 살고 있다는 걸 꼭 알아줬으면 좋겠습니다.
어떤 말로도 쉽게 위로가 되지 않지만, ‘덕분에 안전하게 살고 있다’ 그런 말이 그래도 가장 위로가 될 것 같습니다.
📝정리: 장하엽, 유해정
📒 2.18대구지하철 화재 참사
2.18대구지하철 화재 참사는 2003년 2월 18일 대구 중앙로역에서 발생한 화재로 최소 192명이 희생되고, 21명이 실종됐으며, 151명이 다친 사건이다. 방화로 화재가 발생했으나 불쏘시개와 다를 바 없는 전동차 내장재, 1인 승무원제, 대구시와 대구지하철공사의 미흡한 초기 대처가 피해와 고통을 키웠다. 참사가 발생한 지 23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희생자들의 추모 문제는 해결되지 못했다.
📩 마주, 봄 우리 곁에서 함께 살아가고 있는 재난 피해자들의 이야기를 담습니다. 이들의 이야기가 마음의 징검다리를 건너 널리, 깊게, 그리고 오래 기억되기를 바랍니다. 이번 [마주, 봄]은 재난피해자권리센터 '우리함께'가 청강문화산업대학교 애니매이션학과와 함께 진행 중인 '참사와 서사' 수업에서 전재영님이 나눠주신 이야기를 정리해 재구성한 것입니다. |
Q. 얼마나 힘든 시간과 고통을 경험하셨을지 헤아리기조차 어렵습니다. 가족분들을 수습하신 뒤에 일상은 어떠하셨는지요.
A. 사실 저는 아직도 일상으로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그날 이후 돌아온 적이 없습니다. 참사 직후부터 대구시 시민회관에서 노숙 생활로 1년, 대책위원회 사무실에서 1년을 보냈습니다. 운영하던 컴퓨터 학원도 처음에는 다른 강사들에게 맡겼다가 접었습니다. 대구지하철 참사 희생자 대책위원회의 활동이 제 전업이 돼버렸지요.
시신을 찾은 뒤에 직장이든, 일상이든 돌아가신 분들도 계십니다. 밖에서 보면 그분들이 일하고 일상생활을 하는 것처럼 보일 겁니다. 하지만 사실은 누가 밥을 먹으라 해서 밥을 먹고 피로에 지쳐서 겨우 잠을 잤을 겁니다. 친구든 친척이든 주변 사람들이 이젠 잊어버리고 제대로 좀 살라고 말을 하면 대답은 알겠다고 했겠지만 그렇지 못하고 살았을 겁니다. 그게 참 잘 안 됩니다.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는 말이 이해됩니다. 우리 딸이 살아있었으면 지금 스물아홉입니다만, 저는 일곱 살까지의 기억밖에 없어요. 스물아홉이면 사회생활도 하고 애인도 생기고 그랬을 나인데 오로지 제 상상뿐인 거죠. 아이가 어렸을 때 제가 학원에서 퇴근해서 느지막이 오면 딸 아이가 밥 먹는 제 무릎에 앉아서 애교를 떨었어요. 오늘 어린이집에서 이랬다, 저랬다… 말은 좀 느렸지만, 종알종알 이야기했어요. 아직도 딸 생각만 하면 무너져요. 참사 초기에는 그때 무릎에 앉아 있던 딸의 무게를 느꼈었는데 이제는 다 그 무게를 느낄 수가 없어요. 잊고 싶지 않은데도 다 잊히더라고요…
제일 싫은 게 저 혼자 제사를 지내는 겁니다. 제삿날만 되면 신경질이 팍팍 납니다. 아내랑 둘이서 잘 때 “당신은 나보다 하루 오래 살아라, 내가 먼저 죽을 테니 내 뒤처리하고 죽어라.” 그렇게 내가 농담하면 아내가 “내가 먼저 죽을 거다, 당신이 다 처리하고 죽든지 살든지 장가를 가든지 말든지 그렇게 해라”고 그렇게 장난을 치곤 했었는데, 제가 왜 내 아내 제사를 지내야 하는지…. 문득문득 아내 생각이 납니다.
친구들을 만나서 밥도 먹고, 이야기도 하고, 농담도 합니다. 하지만 사람들 눈치가 보여요. 맛있는 음식을 먹으러 갔는데 옆 테이블에 아는 사람이 있으면 ‘자기 아내, 자기 새끼 잃어놓고 밥 잘만 먹네’ 그런 생각을 할 것만 같습니다. 자동차가 고장이 나서 바꾸는 데도 그것조차 눈치가 보이는 거예요. ‘내가 죄인이다…’ 저 자신이 그렇게 보입니다.
우리 아들이 참사 당시에 초등학교 5학년이었어요. 지금 서른두 살인데 지금까지 22년간 참사에 대해서 한 번도 대화해보지 않았습니다. 아들에게 사고가 났을 때 ‘네 엄마와 동생이 대구지하철 화재참사로 죽었다’라고 이야기를 꺼냈어요. 울 줄 알았는데 울지도 슬퍼하지도 않고 그냥 가만히 있더라고요. 대구지하철 화재참사에 신경을 많이 쏟다 보니 아들에게는 신경을 많이 써주지 못하고 키웠습니다. 제가 대구지하철 화재참사로 만들어진 2.18안전문화재단 사무국장으로도 활동했었습니다. 재단에 있으면서 추모 사업을 하면서 대구시와 부딪치다 보니 시청 안에 들어갔다가 경찰들에게 들려 나오기도 하고, 그런 일들이 잦았습니다. 아들을 생각하면 미안하지만 그때 제게는 그 일들이 더 중요했던 것 같습니다.
혼자 컸는데 아들이 말썽부리지 않고 잘 커 주어서 고맙습니다. 하지만 주변에는 말해도 아들에게 미안하다, 고맙다는 말을 직접 해주지는 못했습니다. 아들도 나름대로 생각이 있겠지만 꺼내지 않고 있을 거고요. 아들과 참사 관련한 이야기를 나누고 풀어야 한다는 전문가들의 조언을 들었습니다. 그렇지만 솔직히 아들이 무슨 말을 할까 생각하니 무섭습니다.
이 괴로움과 고통을 지고 사는 것이 어쩔 수 없는 업보라고 생각합니다. 어쩔 수 없이 닥친 일이고 기억 속에서 지울 수도 없는 일이죠. 가까운 사람들도 모두 잊고 생업을 하든 다른 걸 해보라 하지만 기억은 결코 사라질 수 없습니다. 모든 유가족이, 특히 자식을 잃은 사람들은 가장 절박하게 잊지 못하고 삽니다. 그만큼 갑작스러운 죽음과 참사가 유가족들에게는 너무 힘듭니다.
(이다원. 청강문화산업대학교. 2025. 기억의 그리움)
Q. 사회적 기억을 남기기 위해 시도된 추모 문제가 아직도 해결되지 못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대구지하철 화재 참사 희생자들을 위한 추모 묘역과 시민들을 대상으로 한 안전 교육을 할 수 있는 추모관을 한 곳에 만들어야만 한다는 게 우리의 주장입니다. 솔직한 심정으론 저도 제 아내와 딸을 경치 좋은 곳에 묻고 싶은 생각이 절박합니다. 그런데도 그러지 않은 건 우리 사회가 참사를 기억하지 못하면, 교육하지 못하면 이런 죽음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기 때문입니다.
저희가 그 추모 사업 조성지만 다섯 번을 옮겼습니다. 맨 마지막으로 결국 팔공산 자락으로 왔는데 관광지 주변이라 지정 당시부터 지금까지 주변 상인들과 땅 주인들의 반대가 심합니다. 그 과정에서 대구시의 행태에 문제가 많았습니다. 인근 주민들에게는 추모시설이 들어오지 않는다고 문서를 써줬고, 우리에겐 주민들이 반대하니 먼저 시설을 만들어놓고 다음에 공식화하자. 또 유가족들에게 대구시 담당자들과 소방본부 담당자들이 CCTV를 돌려놓을 테니 주민들이 모르게 와서 먼저 희생자들의 유골을 매장하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추후에 문제가 되자 한 입으로 두말을 한 적도 없고, 가족들에게 공문서도 준 적도 없고, 유가족들이 몰래 독단적으로 한 짓이라며 발뺌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대구시민안전테마파크라는 이름이 아닌 이곳이 2.18 기념공원으로 공식 명명될 수 있도록, 여기에 묻힌 유해가 수목장의 형태로 안식에 들 수 있게 해달라고 요구 중입니다. 이것이 공식화되지 않으면 몸만 있고 이름이 없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희생된 분들이 이곳에 있고, 이곳이 추모지임을 공식화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긴 시간이 흐린 지금까지도 대구시와 우리 희생자 가족들 간의 소송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대구시는 권력이 있는 집단이고, 우리는 힘없는 사람이다 보니 법정 싸움이 쉽지는 않습니다. 팔공산에 추모시설을 조성하기 위해 대구시에서 찾아와 대화 나눈 녹취록도 다 남아 있습니다만 공문서가 없어 법적으로 인정이 되지 않고 있어요. 시가 반대 행동을 부추겼다는 증언도 있습니다. 어떤 분은 동사무소에 쓰레기를 버리려고 갔는데 ‘추모 공원 절대 반대’라는 문구로 피켓을 만들고, 플래카드를 걸고 사람을 모아서 구체적으로 반대 행동을 하라고 쓰여 있는 종이를 발견했다고 알려주시기도 했습니다.
Q. 정말 힘들고 지내오셨을 것 같은데, 유가족들 간에는 어떻게 지내시는지 궁금합니다.
A. 저는 한동안 2.18 안전문화재단 사무국장으로도 활동했는데, 유가족의 이야기를 대구시에 전달하고 항의도 하는 상황이다 보니 중간에서 스트레스도 컸습니다. 제가 마흔한 살에 참사를 겪고 올해 예순셋인데, 유가족 중에는 젊은 편입니다. 스무 살, 서른 살의 자식을 잃고 지금 70대, 80대가 되신 분들도 계십니다.
그분들로부터 원망이나 항의도 듣습니다.
“너 대체 뭐 하고 있느냐, 추모 공원 만든다고 한 지가 몇 년인데…. 나 죽기 전에 해내라, 해 낼 수 있겠냐?”
저도 한다고 시에 가서 싸우고, 욕도 하고, 문도 두드려 부수고 하는데, 이게 진척이 안되다 보니까 그런 말씀들을 제게 하세요.
한 분은 암에 걸리셨는데, 어느 날 밤중에 제게 전화하시더라고요.
“나 죽기 전에 추모 공원 되는 것 볼 수 있겠냐.”
그러고 나서 한두 달 뒤에 돌아가셨어요. 그 통화를 한 나만이 그 사실을 알고 있는데, 그걸 기억하고 있는 게 굉장히 마음이 아파요.
사실 내 가족이 죽은 것도 제 마음에서 처리를 못 하는데 다른 유가족들의 이야기도 들어야 하고, 이렇게 살아야 하느냐 하는 생각에 스트레스도 받고 굉장히 힘듭니다. 한 2년 전부터는 모든 게 다 귀찮고, 잘못하면 내가 진짜 죽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좁은 캐비닛 속에서 움직이지도 못하는 느낌이었어요. 견디려고 해도 견뎌지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참사에 대한 모든 걸 잊어버리고 싶어서 손을 떼겠다고 말하고 김천에 내려와서 전화도 받지 않고 살았습니다. 그러다 6개월 전부터 다시 조금씩 사람들을 만나고 있습니다.
유가족들이 대구시와 오래 싸워왔지만, 사람이다 보니 많이 지치고 생각이 희미해질 수도 있죠. 실제로 대구시에 뭔가를 기대하고 협조하며 자리를 받는 사람들도 있었어요. 탄압받기도 하고요. 자꾸만 안 좋은 일을 경험하다 보니 유가족 대표로 활동하는 이들이 허약해져서 넘어가면 어쩌나 불안할 때도 있어요. 하지만 지금까지 역할을 잘해주고 있어서 고맙습니다. 저도 잘 협조해 주기 위해 노력하고, 미안한 것도 많습니다. 이렇게 유가족들은 서로 믿고 의지하기도 하고, 원망하고 감시하는 사이기도 합니다.
Q. 마지막으로 시민들에게 바라는 점,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A. 유가족들이 가장 바라는 것은 왜 유가족들이 이런 이야기를 하는지 귀를 기울여주는 것입니다. 우리 유가족들은 누가 시켜서 움직이는 존재들도 아니고, 스스로 생각해서 말합니다. 그러나 언론은 한쪽만을 비출 때가 많아요. 그러니 한 번만 더 곱씹어보고, 요즘에는 인터넷도 발달했으니, 검색이라도 해서 제대로 알아보고 스스로 생각해줬으면 좋겠습니다. 어떤 행동에 동참해 준다면 좋겠지만 그게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저 듣고 넘어가지만 말고, 상세하기 질문을 하든, 전화를 하든, 유가족의 말을 들어보려고 시도했으면 좋겠습니다. 이미 자기가 가진 생각만 더 견고히 하면서 몰아가지 않기를 바랍니다.
지금도 솔직히 내 아내와 딸을 나만 생각하고 슬퍼하면 되지 다른 사람이 함께 슬퍼해 주기를 바라지는 않습니다. 그런데도 언론에 대응도 하고 이런저런 활동을 하게 된 계기가, 한 방송국 기자가 아내와 딸에게 영상으로 편지를 써달라고 한 일이 있었습니다. 제가 아내와 딸을 동시에 잃어서 사연이 특별히 슬프다고 생각했는지 방송국에서 카메라를 많이, 아주 바짝 가져다 댔습니다. 많은 사람의 마음을 흔들 수 있겠지만 언론으로서 특히 유가족들에게 잘못된 행위입니다. 하기 싫다고 욕도 했었는데, 유가족분들이 힘든 건 알지만 언론에 그렇게라도 나와야 다른 사람들이 우리 유가족들이 바라는 게 무엇인지 알 수 있지 않겠느냐 설득하셨습니다. 당시에 유가족들을 폭도처럼 비추는 언론이 워낙 많았으니까요. 그 말씀들에 동의가 되더라고요, 저도 너무 답답했고요.
결국에 촬영은 했는데, 후에 담당 PD가 전화해서 “죄송하다, 저희 생각만 하고 선생님 생각을 안 했습니다. 내보내지 않겠습니다.” 그렇게 사과하고 방송에도 내보내지 않더라고요. 그때 이런 사람도 있구나, 우리 이야기를 전달하면 안 좋게 바라보는 사람도 있어도 이해하고 제대로 받아들이는 사람도 있다고 생각하게 되면서 저를 바꾸게 되었죠.
사실 참사에 대해서 말하는 것도 마음이 힘들고 솔직히 싫습니다. 하지만 여러분들이 알아줬으면 좋겠다는 마음도 있습니다. 안전에 대해 다시 생각하고 또 결정권자가 된다면 우리와 안전을 생각하는 사회로 바꿔줬으면 하는 바람도 가지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대구지하철 화재참사 희생자들과 유가족이 있어 사람들이 조금 더 안전한 세상에 살고 있다는 것도 알아줬으면 좋겠습니다. 대구지하철 화재참사의 영향으로 전국에 있는 지하철 내장재가 모두 불연재로 바뀌었습니다. 참사가 일어나기 전에 그런 변화가 있었으면 좋았겠다고 생각은 하지만 그래도 참사 피해자들의 희생으로 누가 불을 일부러 내도 번지지 않는 그런 세상에 살고 있다는 걸 꼭 알아줬으면 좋겠습니다.
어떤 말로도 쉽게 위로가 되지 않지만, ‘덕분에 안전하게 살고 있다’ 그런 말이 그래도 가장 위로가 될 것 같습니다.
📝정리: 장하엽, 유해정
📒 2.18대구지하철 화재 참사
2.18대구지하철 화재 참사는 2003년 2월 18일 대구 중앙로역에서 발생한 화재로 최소 192명이 희생되고, 21명이 실종됐으며, 151명이 다친 사건이다. 방화로 화재가 발생했으나 불쏘시개와 다를 바 없는 전동차 내장재, 1인 승무원제, 대구시와 대구지하철공사의 미흡한 초기 대처가 피해와 고통을 키웠다. 참사가 발생한 지 23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희생자들의 추모 문제는 해결되지 못했다.
우리 곁에서 함께 살아가고 있는 재난 피해자들의 이야기를 담습니다.
이들의 이야기가 마음의 징검다리를 건너 널리, 깊게, 그리고 오래 기억되기를 바랍니다.
이번 [마주, 봄]은 재난피해자권리센터 '우리함께'가 청강문화산업대학교 애니매이션학과와 함께 진행 중인 '참사와 서사' 수업에서 전재영님이 나눠주신 이야기를 정리해 재구성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