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 책]‘연두, 빛’ 문을 열며 - tvN <혼술남녀> 조연출 고 이한빛PD님의 엄마, 김혜영

2026-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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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두, 빛’ 문을 열며


화창했다. 노란 리본으로 시작된 4월은 올해도 어김없이 아프고 힘들었는데 정작 4월 16일 ‘세월호참사 12주기 기억식’ 가는 길은 눈이 부셨다. 넓은 광장에는 2014년 그날과 지난 시간들이 노란 나비로 날아와 유가족들과 추모객 어깨 위에 앉아있었다. 이 슬픔의 끝은 없다는 것을 알기에 말라버린 눈물로도 하루하루를 버텨왔지만 오늘 어느덧 서른 살이 된 아이를 만나면서 세월호 부모님들은 가슴이 눈물로 가득 찼을 것이다. 그들에게 12년이란 시간은 단지 숫자였을 뿐이니까.


나역시 올해로 아들 한빛이 떠난 지 10년이란 것을 알고 깜짝 놀랐다. 10년은 분명 대단히 긴 시간이다. 그만큼 한빛에 대한 기억도 점점 희미해질 것 같은데 마치 어제 일처럼 모든 게 선명하다. 한빛이 삼십 대 후반이라는 것도, 내 곁에 없다는 것도 순간순간 잊는다. 10년 동안 하루 세 번 식사기도 때마다 한빛을 불렀다. 그리고 남편의 호칭은 오늘도 여전히 ‘한빛아빠’이다. 아직도 세월호냐고 이제는 지겹다고 함부로 내뱉는 누군가의 그 시간을 나도 한빛과 살아왔다. 아직도? 지겹다고? 아니다. 여전히 매일매일은 헤아릴 수 없는 비통함과 탄식으로 가득 차 있다. 문득문득 한빛의 부재를 인식하면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슬픔이 치고 올라왔다. 금방 허둥지둥하면서 일상은 어둠에 휩싸였다. 하루에도 몇 번씩 불쑥불쑥 이렇게 살아왔다. 아니 10년이라는 시간을 견디어왔다. 내 몸은 결코 슬픔을 잊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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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고통과 무기력에 빠질 때면 <슬픔을 겪어야만 열리는 문이 있다 >의 아무 곳이나 펼쳤다. 영혼의 문장가로 불리는 일본의 와카마쓰 에이스케가 사랑하는 아내를 떠나보낸 슬픔과 상실감, 그리고 피치 못하게 맞게 되는 암흑의 시간 동안 그곳을 비추어준 ‘말’들을 쓴 책이다. 저자는 슬픔을 마주함으로써 새로운 삶의 문이 열리고, 그 안에서 얻을 수 있는 인생의 아름다움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또한 슬픔이 단순한 절망이 아니라, 오히려 그런 상황에서도 살아가고자 하는 용기와 희망의 증거임을 강조하며, 슬픔을 겪어야만 보이는 것들을 말하며 깊은 위로를 전한다.


노란색 나비 같은 종이 위에 있는 26편의 짧은 글은 슬픔의 자리를 견디는 말의 온도를 담고 있다. 부드럽고 따듯하다. 자기 자신과 마주하고 슬픔을 통한 삶의 의미와 깊이를 찾을 수 있는 여정을 선사한다. 그래서 조급하지 않다. 흔히 슬픔은 극복해야 할 감정이고, 빠르게 이전의 일상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하지만 저자는 슬픔은 억지로 이겨내야 할 것이 아니라, 머물러야 할 감정이라고 했다. 누군가를 잃은 고통 앞에서 너무 빨리 괜찮아지기를 요구하지 말고, 충분히 아파하고 울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저자는 슬픔의 자리에 오래 머물다 보면 그 감정이 결국 우리 안의 ‘문’을 하나씩 열어간다고 한다. 사랑했던 이와의 추억, 미처 표현하지 못했던 말, 함께했던 시간의 소중함이 그 슬픔의 여백 속에서 다시 떠오르듯이 이렇게 슬픔은 무너짐의 과정인 동시에, 되돌아보게 하고, 살아가는 방식까지 다시 질문하게 만드는 전환점이라는 것이다. 감정을 밀어내지 않고 받아들이고 내 안에 숨겨진 빛의 조각을 하나하나 찾아가는 과정이야말로 우리가 삶을 더 깊이 이해하고, 더 단단하게 살아갈 수 있는 길이라는 것이다.


나의 지난 10년에도 그 빛이 있었을까? 세상 그 어느 것을 주어도 아들 한빛의 부재와는 대체될 수 없기에 빛을 기대하지도 않았고 어둠을 받아들였다. 그런데 저자는 어둠은 빛을 잃은 상태가 아니라 빛을 비추기 위해 준비하는 시간이고 그 빛은 용기와 희망이라고 했다.


이제사 한빛이 주고 간 메시지 ‘연두,빛’이 용기와 희망이었음을 알겠다. 한빛이 닉네임으로 좋아했던 단어, ‘연두, 빛’. ‘연대의 두근거림으로 빛나는’ 그 빛이 결국 지금까지 나를 지탱해왔고 앞으로의 나를 살릴 말임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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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말한다. 이제는 아들의 죽음에서 나와 자신을 위해 살라고. 나에 대한 그들의 안타까움이 고맙지만 나는 세상은 함께 살아가야 함을 한빛을 통해 배웠다. 그토록 ‘연두, 빛’의 삶을 살고자 했지만 외롭게 떠난 한빛은 나를 더 낮은 곳으로, 작은 목소리 곁으로 데려갔다. 그냥 살았다면 전혀 몰랐고 관심조차 두지 않았을 또 다른 세상을 슬픔은 가르쳐줬다. 처절하게 고독했을 한빛을 위해서도 나는 그 누군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하리라. 누군가의 아픔에 그냥 있어 주더라도 곁에 머물러야 하리라. 나역시 그동안 너무나 많은 누군가의 따뜻한 연대, 연두빛 덕분에 한빛을 잃고도 이렇게 살아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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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을 겪어야만 열리는 문이 있다 >는 나에게 슬픔을 단순히 고통스러운 감정이 아닌 새로운 삶과 성장의 시작점으로 바라보게 했다. 또한 우리의 삶은 죽은 삶과 더불어 사는 삶이라는 더 넓은 의미의 연대도 가르쳐줬다.


세월호 12주기 기억식이 끝나고 재난참사피해자연대 유가족들이 한데 모였다. 집회나 추모제에서만 만나지만 언제 봐도 너무나 반갑고 뜨거운 얼굴들. 서로의 안부를 묻고 큰소리로 웃으며 덕담을 주고 받는 따듯한 관계. 아직도 투쟁 중인 가족들을 껴안고 비록 같이 엉엉 울지만 힘차게 파이팅을 외치는 연대의 손길. 슬픔을 겪은 자들만의 유일한 안전지대이다. 이 힘으로 우리는 서로를 부축하고 각자의 자리에서 다음 문을 열려고 애쓸 것이다.


그러나 특별한 기념일이 유독 많은 5월. 나도 그들도 가슴 한가득 차오르는 슬픔으로 매일 울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 주저앉거나 무너질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모두들 슬픔 속에 머물지 않고 이 연두빛 5월에 ‘연두, 빛’ 문을 열며 슬픔을 안고 살아갈 수 있을 용기와 희망을 갖기를 간절히 바란다.


📝 김혜영. tvN <혼술남녀> 조연출 고 이한빛PD님의 엄마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 곁에서 아들의 삶을 이어가려 애쓰고 있다


📸사진 설명 (위에서부터 순서대로) 

사진1. 『슬픔을 겪어야만 열리는 문이 있다』 책표지

사진2. ‘연두, 빛’ (글씨: 더불어 숲 서연순) / ‘대의 근거림으로 나는’의 줄임말 / 한빛이 글 마무리에 즐겨 썼던 닉네임

사진3. 재난참사피해자연대 유가족들과 함께(세월호 12주기 기억식이 끝난 후 유가족들끼리 모여 큰소리로 파이팅을 외치며 연대하는 모습. 서로 손잡고 격려하며 웃을 수 있는 우리의 안전지대)


📚 이달의 책

재난피해자권리센터 '이달의 책'은 재난참사피해자가 또 다른 재난참사피해자에게 건네는 책으로써의 위로이자, 읽고 쓰기를 혼자가 아닌 사회적으로 함께 함으로써 상실 이후를 함께 나누는 장이고자 합니다. 누군가를 떠나보내는 길 위에서, 회복 불가능한 시간을 책으로 겪어내는 이들에게 이달의 책이 잠시라도 숨 쉴 구멍이, 위로가 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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