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 책]오늘도 딸기 따러 갈게 - tvN <혼술남녀> 조연출 고 이한빛PD님의 엄마, 김혜영

2025-11-02





오늘도 딸기 따러 갈게



지난 8월. 아들 친구들이 묘비명을 쓸 수 있을지 조심스레 물었다. 아들이 이번에 어린 시절 복사를 섰던 의정부 신곡2동 성당 ‘하늘의 문’에서 마석 모란공원 민주묘역으로 이사하기 때문이다. 10월 기일까지는 두 달이나 남았고 아들에게 모처럼 깊은 말을 건네고 싶어 쓰겠다고 했다.

그런데 자꾸 미루고 아예 생각조차 안 하려고 버둥대는 나를 보았다. 묘비명이 뭔지도 모르지만 엄마가 아들의 묘비명을 쓴다는 게 슬펐고 새삼 아들의 부재를 확인하는 것 같아 두려웠다.

나는 아직도 ‘한빛은 죽었다’라고 표현하지 못하고 있다. ‘나는 한빛을 잃었다’로 쓴다. 나를 주어로, 한빛은 목적어로 둔다. 한빛이 주어가 되면 진짜로 한빛은 죽었고 이미 세상에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 같아서이다. 또 말이 씨가 되어 정말 한빛이 죽을 것 같아서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한빛이 외롭고 슬플까 봐 내가 대신 감당하고 싶었다. 스스로 열심히 살다 간 스물일곱 해만 돌아봐도 가슴이 미어지는데 이제는 혼자 두고 싶지 않다. ‘잃다’라는 말은 ‘슬픔’에 뿌리를 두고 ‘허망함’과 연결되어 있으니 엄마가 그 감정을 다 안고 있으면 한빛이 조금이라도 가볍지 않을까 해서 덜어주고 싶었다.


 


그러던 중 만난 <딸기 따러 가자>는 아이가 태어나면 바람의 정령이 말을 걸어서 이름을 준다고 믿고 그들이 마주한 계절의 호흡을 열두 달의 감각으로 가지고 있는 아메리카 인디언들의 이야기를 담은 책이다. 지금까지 나는 그들의 말을 낡고 힘없는 아주 오래전 전설의 언어라고 여겼다. 그런데 읽으면 읽을수록 그들의 언어는 마법의 말이었다. 분명 먼 이야기 같은데 나의 현재를 촉촉하게 건드리고 있었다. 그들의 1년 열두 달을 따라가면서 나는 그들에게 의지하기 시작했고 지난 시간들을 돌아보았다. 그들의 말은 새로움을 소망하게 했고 절망 속에서도 넋 놓고 있지 말자고 무언가를 해나가자고 그리고 함께 하자고 했다. 그들의 역사만큼이나 고통스러운 나에게 그들의 말은 빛으로 다가왔고 그 빛은 나를 따듯하게 안아 주었다.

‘딸기 따러 가자’는 앞이 보이지 않을 때 모호크 인디언 할머니가 새벽에 가족을 깨우며 하는 말이다. 할머니는 종종 뭔가 길이 보이지 않을 때, 길을 잃을 것 같을 때, 낙심하고 주저앉지 않고 아이들을 일찍 재우고는 양동이 하나 챙긴다고 한다. 그리고 다음 날 새벽 다섯 시 반, 온 식구를 깨워서 말씀하신다. "딸기 따러 가자"고. 삶이 아무 의미가 없을 때 무언가를 함께 하자며 손을 내밀고 또 그 손 맞잡고 일어날 수 있게 ‘딸기 따러 가자’고 한다는 것이다. 함께 새로운 하루를 열고 새로운 길을 찾자는 것이다. 이 말은 그들의 어머니의 어머니에게서 딸에게 또 딸에게 전해 내려온 삶의 지혜였다. ‘딸기 따러 가자’는 낙심과 우울과 절망을 떨치고 벌떡 일어나게 했고 앞이 보이지 않을수록, 무엇이든 ‘한다’는 것은 그 자체가 구원이라고 말해주고 있었다. 이후 나는 한빛이 너무 그리울 때 그래서 삶이 꽉 막혀있을 때, 불쑥 가슴이 저리고 울음이 터지려고 할 때 부리나케 이 책을 펴보곤 했다.

9주기를 지나며 한빛이 따고자 했던 딸기를 하나하나 바구니에 담았다. ‘아파했던 이들이 적어도 지금보다 웃을 수 있기를’ ‘올겨울은 춥단다. 세월호와 정리해고로 아픈 모든 이들, 언제나 나를 이해해주는 부모님까지 덜 추운 겨울을 보냈으면 한다.’ ‘연두, 빛 : (연)대의 (두)근거림으로 (빛)나는’

문득 2017년 한빛의 죽음을 처음으로 공론화할 때 한빛에게 한 약속이 떠올랐다. ‘너를 가슴에 묻지 않고 부활시킬 거라고.’ 죽었던 사람이 다시 살아날 수는 없지만 예수님의 가르침이 제자들에 의해서 죽지 않고 되살아났듯이 엄마도 너의 죽음이 결코 헛되지 않고 너가 사회에 던지고자 했던 메시지가 실현될 때까지 최선을 다해 너를 부활시키겠다고 했다. 이번에 나는 딸기를 따면서 한빛을 만났고 한빛이 내민 손을 다시 꼬옥 잡았다.

한빛에게 말했다. ‘네가 머문 시간이 지금, 여기에 있어 기쁘게 떳떳하게 오늘을 시작할 수 있었고 누구보다 치열하고 반짝반짝 살아냈던 너였기에 엄마는 희망을 붙잡을 수 있었다. 세상을 적당히 사랑하지 않았던 너의 순간들이 우리를 기어이 살아가게 했다. 너에게 너무 많은 것을 받았다. 함께 해서 행복했어. 고마워(엄마가 쓴 묘비명)’

한빛아. 오늘도 엄마는 딸기 따러 갈게.





 김혜영tvN  <혼술남녀> 조연출 고 이한빛PD님의 엄마.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 곁에서 아들의 삶을 이어가려 애쓰고 있다.




사진 설명 (위에서부터 순서대로)

사진1. 책 『딸기 따러 갈게』 표지.

사진2. 이한빛PD 묘비명

사진3. 이한빛PD 약력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 홈페이지

https://hanbit.center/



●  이달의 책
재난피해자권리센터 '이달의 책'은 재난참사피해자가 또 다른 재난참사피해자에게 건네는 책으로써의 위로이자, 읽고 쓰기를 혼자가 아닌 사회적으로 함께 함으로써 상실 이후를 함께 나누는 장이고자 합니다. 누군가를 떠나보내는 길 위에서, 회복 불가능한 시간을 책으로 겪어내는 이들에게 이달의 책이 잠시라도 숨 쉴 구멍이, 위로가 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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