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 책]슬픔 이후 이야기의 발명 - tvN <혼술남녀> 조연출 고 이한빛PD님의 엄마, 김혜영

2026-0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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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 이후 이야기의 발명



찬바람만이 쓰레기를 몰고 들어왔다 나가던 시골정류장의 어둠은 그래도 따듯했다. 버스 문이 열리면 아버지를 향해 뛰어가 안길 수도 있고 궁금해하며 언니의 양손에 든 서울 선물을 기다리기도 했으니까.

 

그러나 상실(죽음)은 원상회복이 애초 불가능했다. 없어지거나 사라져 관계가 끊어지거나 헤어져야 했다. 최선을 다하면 최소한의 희망은 가질 수 있다는 삶에 대한 기대를 깡그리 무너뜨렸다. 모든 것은 가치가 없어져 나는 스스로 고립을 택했다. 광야에 홀로 버려진 것 같은 삶을 살았다. 매일 마음이 춥고 시도 때도 없이 눈물이 흘렀다. 슬펐다. 아름다움을 봐도 감탄이 일지 않았고 설렘도 없고 살아있다는 것이 귀찮았다. 그러던 어느 날 주변의 죽음까지도 무감각해하는 나를 보고 소름이 끼쳤다. 지인 부모님의 부고에도 내 부모님을 생각해 애도하기보다는 아들이 살고 간 스물일곱 해와 비교하며 함께 슬퍼하는 여정을 피했다. 나는 내가 무서워졌다.


그러나 방법이 없었다. 과연 이 슬픔에 답이 있을까? 내가 죽어야 이 고통이 끝날 텐데 이보다 더 절망적인 것이 있을까? 나에게는 더이상 어떤 이야기도 존재할 수 없고 어떤 새로운 것도 없을 거라고 단정했다. 억울하지도 않았다. 자식이 없는데 그 이상의 감정은 사치라고 생각했다.


슬픔 이후 슬픈 삶을 살고 있을 때 <삶의 발명>이 가슴을 훅 치고 들어왔다. ‘삶’이라는 단어조차도 낯선 나에게 ‘당신은 어떤 이야기의 일부가 되겠습니까’ 질문했다. ‘삶’이나 ‘발명’이란 단어가 앞으로의 나의 사전에도 존재할까? 이제는 나와는 먼 이야기 아닌가? 2년 전 이 책을 선물한 후배도 내가 ‘나의 이야기를 찾고 만나고 만나기’를 간절하게 강요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다른 사람들의 삶이 아무리 대단하거나 처참해도 자식을 먼저 보낸 엄마의 삶에는 격려가 될 수 없다고 단정했다. 그러면서 꾸역꾸역 읽었는데 뜻밖에도 이번에는 하염없이 밑줄을 긋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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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저마다 자리에서 삶을 발명한 사람들의 이야기와 그 이야기가 이끄는 삶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그러면서 자신의 삶을 좀 더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 힘이 필요할 때 삶의 발명은 이렇게 말한다. “하지만 다르게 시작하는 이야기가 있어”. 공허하거나 변화가 필요할 때도 “다른 이야기가 필요해”하고 말한다. 그리고 선택이 필요할 때는 “어떤 이야기의 일부분이 되고 싶어?”하고 묻는다.


지난 6월말. 푸리가 무지개다리를 건넜다. 푸리는 한빛이 키우다가 두고 간 고양이이다. 올해 초부터 푸리에게서 죽음의 그림자를 문득문득 느꼈다. 사람의 나이로 100살에 가까우니 어쩔 수 없지 하면서도 푸리가 죽을 것을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졌다. 유일하게 남아있는 한빛의 흔적이 영원히 없어져서일까? 그럼에도 나는 소리내 울지 않았다. 푸리한테 정말 미안했지만 참고 참았다. 그런데 오늘 아침 거실로 나가면서 “푸리야”하고 불렀다. 푸리가 있는 줄 알았다. 이어서 복받치듯 울음이 터졌다. 울음 말고는 내 마음을 표현할 수 없음에도 안간힘으로 버티며 슬픔까지도 외면해야 할 이유를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나자신에게조차 솔직하지 못한 채 슬픔 이후의 이야기를 살아가고 있었다. 엉엉 울면서 푸리에게 이제는 삶에 솔직해지겠다고 진짜 나의 삶을 살아가겠다고 약속했다.



작가는 이야기들이 기쁘게 이 세상의 일부가 되기를 희망하고, 더 나은 존재 방식을 원하고 만들고 싶어하는 누군가의 마음에 가닿고 힘이 된다면 행복하다고 했다. 아울러 지금 살고 있는 삶에 ‘더 나은’ ‘더 새로운’이라는 단어를 넣으면 그게 삶의 발명이라고 했다.


한참 전에 학고재 갤러리에서 정동석의 <깊은 생각에 잠긴>(2018) 연작을 보았다. 나무의 한 기둥에 산 가지와 죽은 가지가 공존하고 있는 사진이다. 삶과 죽음은 하나라는 의미이다. 죽음은 삶의 연장이고 삶은 죽음을 향해 가는 과정이므로 삶과 죽음이 한 뿌리에서 나온 한 몸임을 암시하는 작품이다. 그날 밤 작품을 기억하며 그림을 그렸다. 컵 하나에는 초록잎이 무성한 나무 한 그루를, 다른 컵에는 비록 한 나뭇가지는 죽었지만 다른 한 나뭇가지는 꽃을 피워 다시 한 그루가 된 나무를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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컵 그림을 다시 보면서 나에게 물었다. 아니 대답했다. 슬픔과 함께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겠다고. 삶과 죽음이 공존하듯 한빛과 나는 항상 같이 있으니 함께 이야기를 발명해 나가겠다고. 많은 노력을 해야겠지만 나는 기꺼이 그 이야기의 일부가 되겠다고.


📝 김혜영. tvN  <혼술남녀> 조연출 고 이한빛PD님의 엄마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 곁에서 아들의 삶을 이어가려 애쓰고 있다


📸사진 설명 (위에서부터 순서대로) 

사진1. 『삶의 발명』 책표지

사진2. 고양이 푸리가 한빛 침대에서 독서하다 잠이 든 모습

사진3. 삶과 죽음이 공존함을 의미하는 나무를 그린 컵


📚 이달의 책

재난피해자권리센터 '이달의 책'은 재난참사피해자가 또 다른 재난참사피해자에게 건네는 책으로써의 위로이자, 읽고 쓰기를 혼자가 아닌 사회적으로 함께 함으로써 상실 이후를 함께 나누는 장이고자 합니다. 누군가를 떠나보내는 길 위에서, 회복 불가능한 시간을 책으로 겪어내는 이들에게 이달의 책이 잠시라도 숨 쉴 구멍이, 위로가 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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