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Q. 자기소개를 부탁드립니다.
A. 경북 김천에서 컴퓨터 학원을 하며 살고 있었습니다. 사고가 났을 때 딸아이가 일곱 살이었습니다. 말이 느려 대구에 있는 영남대학교 병원에서 한 달에 한두 번 치료를 받았는데, 이제 더 이상 안 와도 된다고 했을 때 사고가 났습니다. 김천에는 지하철 같은 시설이 없어서 아이가 기차 타고 지하철을 타고 병원에 가는 것을 좋아했어요. 그날 병원에 갈 때 나는 학원을 늦게 여니 이불 속에 있었고, 딸내미는 유치원에 다녀서 ‘아빠 잘 갔다 올게요’ 인사를 하고, 아이 엄마는 무뚝뚝하게 옆에서 서 있었어요. 이불 속에서 ‘내가 데려다줄까?’ 생각했는데 귀찮아서 “잘 갔다 와”하고 보냈던 게 굉장히 후회됩니다. 내가 그때 데려다 줬으면 그런 사고가 안 났을 텐데… 평생 갈 것 같아요.
당시에는 참사가 발생하면 시신을 수습하고 장례식을 치르고 한쪽 구석에 추모탑을 만드는 것으로 일단락되곤 했습니다. 저도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는데, 후에 희생자 대책위원회 위원장이 된 윤석기 씨가 “단순히 수습만 하고 끝난다면 너무 허망하지 않냐, 앞으로도 다른 참사가 일어날 것인데 계속해서 이런 형태로 끝나는 건 안 된다, 추모관을 만들어서 안전에 대해서 교육하는 게 우리의 의무다.”라고 이야기를 꺼냈어요. 처음에는 내 아내, 내 딸의 시신을 찾는 것에만 몰두했어요. 내 아내, 내 새끼가 죽고 없는데 무슨 안전이 필요하냐, 생각했던 거죠.
생각해보세요.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하루아침에 죽었다고. 정말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 거예요. 내 가족이 죽어서 어떻게 해야 하나 당황스럽기만 하고, 겨우 일곱 살인 내 아이가 뭘 잘못했다고 이렇게 죽어야 하나, 모든 신들이 원망스럽고 억울하고… 사무친 마음에 삼풍백화점 붕괴 참사(1995년 6월 29일 발생, 502명 사망, 30명 실종, 937명 부상) 등 이전에 발생한 참사에 대해 원망도 했었습니다. 왜 안전에 대한 말들을 강조하지 않았는지…. 나중에야 알았어요. 언론 보도가 되지 않았던 것이라는 걸.
조금 시간이 지난 뒤에 살아있는 제 아들의 존재가 떠올랐습니다. 이 아이도 재난을 당할 수 있는 것 아닌가…. 그렇게 안전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안전에 무관심하면 이런 사고가 또다시 일어날 수 있다고, 내 삶과 주변의 삶을 망치는 사고가 일어날 수 있음을 심각하게 생각하게 된 거죠. 아무것도 하지 않고 돌아가게 되면 아내와 딸의 죽음에 대해 오로지 나의 기억만 남을 뿐 아무것도 없더라고요. 돌아가신 분들의 명예도 찾고, 의미도 있으려면 기억할 수 있는 추모 사업을 해나가야 한다, 그렇게 생각이 바뀌었던 거죠.

Q. 피해자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대구지하철 화재 참사는 왜 발생했고, 어떤 게 가장 큰 문제였나요?
A. 대부분 언론이 대구지하철 화재 참사의 원인을 자기 처지를 비관해 죽으려고 했던 뇌졸중 환자에 의한 방화라고 보도했습니다. 우리도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어요. 하지만 조금만 더 생각해보니 그게 핵심이 아니었어요. 유가족이 생각하는 1차 원인은 지하철 내장재를 불에 잘 타는 가연성 소재로 만든 것이었습니다. 당시 전국의 모든 지하철 내장재는 가연재로 만들어져 운행됐습니다. 대구가 특별한 게 아니라, 서울에서 누군가 불을 냈다면 서울에서 이런 사고가 났을 겁니다.
우리 참사 얼마 지나지 않아 홍콩에서도 지하철에서 불이 났습니다. 그런데 홍콩은 멀쩡했어요. 그 지하철은 심지어 우리나라에서 수출한 지하철이었습니다. 수출할 수 있는 기술력까지 갖췄지만 우리나라는 비용 절감을 위해 가연재로 내장재를 만든 지하철을 운행했기 때문에 불이 나고 이렇게 많은 사람이 죽고 다쳤던 것이지요. 지하철을 불에 잘 타지 않는 내장재로 만들었다면 누가 불을 내더라도 발생하지 않았을 사고였습니다.
이렇게 참담한 사고가 났는데, 대구시는 사고를 수습한다며 수백 명이 죽었는데 지하철 사고 현장을 보존하기는커녕 다음 날 아침에 (군부대를 동원해) 물청소를 해버렸습니다. 보통 불이 나면 화재 장소에 경찰 통제선을 치고 조사가 끝날 때까지 두잖아요? 누가, 왜 그런 결정을 내렸는지 따져서 책임을 묻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죗값을 치른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당시 법정 진술에서 대구지하철공사 사장은 대구시장에게 중앙로역을 정리하기 위해 청소해야 한다고 말했고 이에 대구시장이 고개를 끄덕여 물청소했다고 진술했습니다. 하지만 대구시장은 물청소를 허락한 것이 아니라, 말을 들었다는 의사표시로 끄덕였을 뿐이라고 말했습니다. 법원은 두 사람 모두에게 무죄를 선고했고 결국 아무도 책임지지 않았어요.
Q. 유가족들은 어떻게 모이셨고, 참사 이후 어떤 일들을 해오셨는지요?
A. 처음에 가족들은 오직 내 가족의 시신을 찾기 모였습니다. 서울, 강원도, 경북 지역 등 곳곳에 흩어져 있던 피해자 가족들이 가족을 찾겠다는 일념 하나로 당시 화재가 발생한 대구 중앙로역 근처 시민회관에서 1년 가까이 노숙 생활하며 지냈습니다. 희생자 수도 너무 많았고, 화재 참사였기에 시신을 찾기도 어렵고, 신원을 확인하기도 어려워서 시신을 수습하고 신원을 확인하는 데 정말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참사는 2월 18일에 발생했는데 장례식이 6월 29일이었을 정도였으니까요. 그사이 참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참사 3일 정도 후에 국과수에서 희생자 가족들에게 화재 참사였기에 시신의 형상을 알아보기 힘들 것일 뿐더러, DNA 검사로 신원을 확인해야 할텐데 노인과 여성, 아이들은 DNA 검출이 잘 안되고, 화장터보다 두 배 가까이 되는 1,500도에서 30여 분간 불탔기에 DNA가 아예 소실되었을 수도 있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아내가 여자, 딸아이는 여자인 데가 어리기까지 하니 그 말을 듣고 마음이 참 참담했었습니다.
그런데 그다음 날 대구시장이 대강당에 우리를 모아 놓고 증거가 있는 사람만 참사 피해자로 인정해 주겠다는 겁니다. DNA가 검출된 사람, 지하철을 탄 증거가 있는 사람만 인정해 주고 다른 것은 인정할 수 없다는 거예요. 희생자 가족들이 난리가 났습니다. 내 가족이 분명 지하철에 탔다가 죽었는데, 피해자로 인정을 안 해줘서 가출한 사람으로 처리되어 버리게 되었으니 난리가 났지요.
가족들이 역마다 CCTV 비디오 테이프를 찾아 다녔습니다. 처음에는 보여 주려고도 하지 않아서 너 죽고 나 죽자, 난리를 피웠습니다. (정보를 내놓으라는) 소송도 했습니다. 그렇게 테이프를 찾아서 시민회관에서 틀었는데 화질이 너무 희미했습니다. 그래도 나는 내 가족인 걸 알잖아요? 집에서 입는 고동색 바지를 입고, 내 아내와 딸이 서 있으니 찾아요. 그런데 제삼자가 보면 모릅니다. 그때 정보과 형사들이 많이 왔다 갔다 해서 그 사람들에게 물어봤습니다.
“내 아내, 내 딸인 게 확실한데 사망자로 인정이 되겠냐?”
“잘 모르겠다.”
참 처참하죠. 내가 내 가족의 죽음을 납득시키고 인정을 받아야 한다니…. 희생자 가족이 그런 노력을 해야 하는 겁니다. 어떤 분들은 한 달 정도 자기 가족이 탄 지하철역 앞에 팻말을 들고 전화번호를 적어서 본 사람이 있으면 연락을 달라고 서 있기도 했어요.
어떤 가족들은 직접 유해를 찾겠다고 나섰습니다. 대구시와 대구지하철공사가 사고 현장에 물청소했다고 했잖아요? 청소 과정에서 혹시 유해나 유품이 훼손된 것은 아닌가 싶어 사고가 난 중앙로역에서 사고 지하철이 보관된 안심기지창까지 철길을 따라 일일이 불빛을 비춰가면서 혹시 떨어진 유해가 없는지 찾아 헤맸습니다. 대구시가 분류해 놓은 쓰레기 더미도 뒤졌습니다. 그렇게 하며 유골 스물일곱 점을 희생자 가족들이 직접 찾아냈습니다. 희생자 한 분은 수습된 시신이 오른쪽 무릎 뼈 단 한 점인데 그 유해를 가족들이 그 쓰레기 더미에서 발견했습니다. 가족들이 나서서 찾지 않았다면 그분은 피해자로 인정받지 못했을 겁니다.
당시 희생자 가족들은 어떻게든 가족들을 찾겠다고 하고 있는데 대구시에서는 가족들을 지원하기는커녕 우리가 유별나게 군다며 빨리 집에 가라고 했습니다. 맨바닥에서 지내다가 언론에서 비판하니 그제야 스티로폼을 깔아줬습니다. 담요도 희생자들이 항의하니 챙겨주기 시작했는데 희생자 가족은 300명인데 고작 70여 장을 가져왔더라고요… 생각해보세요? 누가 가족을 잃고 그런 생활을 하고, 그런 대우를 받고 싶겠습니까?
한 번은 제가 맨바닥에서 잠을 자는데 옆에 계시던 할머니가 저를 찍은 사진을 보여주더라고요. 제가 옆으로 누워서 몸을 바짝 오므리고 잔다고. 그렇게 자면 문제가 생기니 똑바로 자거나 편안한 방에 들어가서 자라고. 하지만 당시에는 그렇게 지내는 게 더 편했어요. 가족 대부분이 불면증을 겪습니다. 저도 그렇고요. 아내와 딸 생각을 하다 보면 잠이 잘 안 와요. 피로가 누적돼 몸이 제대로 가눠지지 않아야 잠을 자는 거죠. 지금은 그게 습관이 되었습니다. 자려고 해도 잠을 못자요. 졸려서 침대로 몸을 옮기면 정신이 멀쩡해집니다.
여러 일들을 겪으면서 우리나라에 대해서, 특히 참사에 대해서 생각이 많이 바뀌었습니다. 이 나라가 참 끔찍한 나라구나… 시도 정부도 참사를 책임지지 않는구나… 그 피해자들을 신경을 쓰지 않는구나… 우리 가족들만 이런 일을 겪은 게 아닙니다. 과거에도 지금도 별반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유가족들이 가장 많이 듣는 말이 보상금을 많이 받지 않았느냐, 너무 심하게 행동하고 요구하는 거 아니냐 말입니다. 하지만 누구든지 주변 사람의 죽음을 겪는다면 제가 경험해왔고, 지금 겪고 있는 절망감을 똑같이 느낄 겁니다.

임성은(청강문화산업대학교), 2005, 전하고 싶은 마음
📝정리: 장하엽, 유해정
📒 2.18대구지하철 화재 참사
2.18대구지하철 화재 참사는 2003년 2월 18일 대구 중앙로역에서 발생한 화재로 최소 192명이 희생되고, 21명이 실종됐으며, 151명이 다친 사건이다. 방화로 화재가 발생했으나 불쏘시개와 다를 바 없는 전동차 내장재, 1인 승무원제, 대구시와 대구지하철공사의 미흡한 초기 대처가 피해와 고통을 키웠다. 참사가 발생한 지 23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희생자들의 추모 문제는 해결되지 못했다.
📩 마주, 봄 우리 곁에서 함께 살아가고 있는 재난 피해자들의 이야기를 담습니다. 이들의 이야기가 마음의 징검다리를 건너 널리, 깊게, 그리고 오래 기억되기를 바랍니다. 이번 [마주, 봄]은 재난피해자권리센터 '우리함께'가 청강문화산업대학교 애니매이션학과와 함께 진행 중인 '참사와 서사' 수업에서 전재영님이 나눠주신 이야기를 정리해 재구성한 것입니다. |
Q. 자기소개를 부탁드립니다.
A. 경북 김천에서 컴퓨터 학원을 하며 살고 있었습니다. 사고가 났을 때 딸아이가 일곱 살이었습니다. 말이 느려 대구에 있는 영남대학교 병원에서 한 달에 한두 번 치료를 받았는데, 이제 더 이상 안 와도 된다고 했을 때 사고가 났습니다. 김천에는 지하철 같은 시설이 없어서 아이가 기차 타고 지하철을 타고 병원에 가는 것을 좋아했어요. 그날 병원에 갈 때 나는 학원을 늦게 여니 이불 속에 있었고, 딸내미는 유치원에 다녀서 ‘아빠 잘 갔다 올게요’ 인사를 하고, 아이 엄마는 무뚝뚝하게 옆에서 서 있었어요. 이불 속에서 ‘내가 데려다줄까?’ 생각했는데 귀찮아서 “잘 갔다 와”하고 보냈던 게 굉장히 후회됩니다. 내가 그때 데려다 줬으면 그런 사고가 안 났을 텐데… 평생 갈 것 같아요.
당시에는 참사가 발생하면 시신을 수습하고 장례식을 치르고 한쪽 구석에 추모탑을 만드는 것으로 일단락되곤 했습니다. 저도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는데, 후에 희생자 대책위원회 위원장이 된 윤석기 씨가 “단순히 수습만 하고 끝난다면 너무 허망하지 않냐, 앞으로도 다른 참사가 일어날 것인데 계속해서 이런 형태로 끝나는 건 안 된다, 추모관을 만들어서 안전에 대해서 교육하는 게 우리의 의무다.”라고 이야기를 꺼냈어요. 처음에는 내 아내, 내 딸의 시신을 찾는 것에만 몰두했어요. 내 아내, 내 새끼가 죽고 없는데 무슨 안전이 필요하냐, 생각했던 거죠.
생각해보세요.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하루아침에 죽었다고. 정말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 거예요. 내 가족이 죽어서 어떻게 해야 하나 당황스럽기만 하고, 겨우 일곱 살인 내 아이가 뭘 잘못했다고 이렇게 죽어야 하나, 모든 신들이 원망스럽고 억울하고… 사무친 마음에 삼풍백화점 붕괴 참사(1995년 6월 29일 발생, 502명 사망, 30명 실종, 937명 부상) 등 이전에 발생한 참사에 대해 원망도 했었습니다. 왜 안전에 대한 말들을 강조하지 않았는지…. 나중에야 알았어요. 언론 보도가 되지 않았던 것이라는 걸.
조금 시간이 지난 뒤에 살아있는 제 아들의 존재가 떠올랐습니다. 이 아이도 재난을 당할 수 있는 것 아닌가…. 그렇게 안전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안전에 무관심하면 이런 사고가 또다시 일어날 수 있다고, 내 삶과 주변의 삶을 망치는 사고가 일어날 수 있음을 심각하게 생각하게 된 거죠. 아무것도 하지 않고 돌아가게 되면 아내와 딸의 죽음에 대해 오로지 나의 기억만 남을 뿐 아무것도 없더라고요. 돌아가신 분들의 명예도 찾고, 의미도 있으려면 기억할 수 있는 추모 사업을 해나가야 한다, 그렇게 생각이 바뀌었던 거죠.
Q. 피해자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대구지하철 화재 참사는 왜 발생했고, 어떤 게 가장 큰 문제였나요?
A. 대부분 언론이 대구지하철 화재 참사의 원인을 자기 처지를 비관해 죽으려고 했던 뇌졸중 환자에 의한 방화라고 보도했습니다. 우리도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어요. 하지만 조금만 더 생각해보니 그게 핵심이 아니었어요. 유가족이 생각하는 1차 원인은 지하철 내장재를 불에 잘 타는 가연성 소재로 만든 것이었습니다. 당시 전국의 모든 지하철 내장재는 가연재로 만들어져 운행됐습니다. 대구가 특별한 게 아니라, 서울에서 누군가 불을 냈다면 서울에서 이런 사고가 났을 겁니다.
우리 참사 얼마 지나지 않아 홍콩에서도 지하철에서 불이 났습니다. 그런데 홍콩은 멀쩡했어요. 그 지하철은 심지어 우리나라에서 수출한 지하철이었습니다. 수출할 수 있는 기술력까지 갖췄지만 우리나라는 비용 절감을 위해 가연재로 내장재를 만든 지하철을 운행했기 때문에 불이 나고 이렇게 많은 사람이 죽고 다쳤던 것이지요. 지하철을 불에 잘 타지 않는 내장재로 만들었다면 누가 불을 내더라도 발생하지 않았을 사고였습니다.
이렇게 참담한 사고가 났는데, 대구시는 사고를 수습한다며 수백 명이 죽었는데 지하철 사고 현장을 보존하기는커녕 다음 날 아침에 (군부대를 동원해) 물청소를 해버렸습니다. 보통 불이 나면 화재 장소에 경찰 통제선을 치고 조사가 끝날 때까지 두잖아요? 누가, 왜 그런 결정을 내렸는지 따져서 책임을 묻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죗값을 치른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당시 법정 진술에서 대구지하철공사 사장은 대구시장에게 중앙로역을 정리하기 위해 청소해야 한다고 말했고 이에 대구시장이 고개를 끄덕여 물청소했다고 진술했습니다. 하지만 대구시장은 물청소를 허락한 것이 아니라, 말을 들었다는 의사표시로 끄덕였을 뿐이라고 말했습니다. 법원은 두 사람 모두에게 무죄를 선고했고 결국 아무도 책임지지 않았어요.
Q. 유가족들은 어떻게 모이셨고, 참사 이후 어떤 일들을 해오셨는지요?
A. 처음에 가족들은 오직 내 가족의 시신을 찾기 모였습니다. 서울, 강원도, 경북 지역 등 곳곳에 흩어져 있던 피해자 가족들이 가족을 찾겠다는 일념 하나로 당시 화재가 발생한 대구 중앙로역 근처 시민회관에서 1년 가까이 노숙 생활하며 지냈습니다. 희생자 수도 너무 많았고, 화재 참사였기에 시신을 찾기도 어렵고, 신원을 확인하기도 어려워서 시신을 수습하고 신원을 확인하는 데 정말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참사는 2월 18일에 발생했는데 장례식이 6월 29일이었을 정도였으니까요. 그사이 참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참사 3일 정도 후에 국과수에서 희생자 가족들에게 화재 참사였기에 시신의 형상을 알아보기 힘들 것일 뿐더러, DNA 검사로 신원을 확인해야 할텐데 노인과 여성, 아이들은 DNA 검출이 잘 안되고, 화장터보다 두 배 가까이 되는 1,500도에서 30여 분간 불탔기에 DNA가 아예 소실되었을 수도 있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아내가 여자, 딸아이는 여자인 데가 어리기까지 하니 그 말을 듣고 마음이 참 참담했었습니다.
그런데 그다음 날 대구시장이 대강당에 우리를 모아 놓고 증거가 있는 사람만 참사 피해자로 인정해 주겠다는 겁니다. DNA가 검출된 사람, 지하철을 탄 증거가 있는 사람만 인정해 주고 다른 것은 인정할 수 없다는 거예요. 희생자 가족들이 난리가 났습니다. 내 가족이 분명 지하철에 탔다가 죽었는데, 피해자로 인정을 안 해줘서 가출한 사람으로 처리되어 버리게 되었으니 난리가 났지요.
가족들이 역마다 CCTV 비디오 테이프를 찾아 다녔습니다. 처음에는 보여 주려고도 하지 않아서 너 죽고 나 죽자, 난리를 피웠습니다. (정보를 내놓으라는) 소송도 했습니다. 그렇게 테이프를 찾아서 시민회관에서 틀었는데 화질이 너무 희미했습니다. 그래도 나는 내 가족인 걸 알잖아요? 집에서 입는 고동색 바지를 입고, 내 아내와 딸이 서 있으니 찾아요. 그런데 제삼자가 보면 모릅니다. 그때 정보과 형사들이 많이 왔다 갔다 해서 그 사람들에게 물어봤습니다.
“내 아내, 내 딸인 게 확실한데 사망자로 인정이 되겠냐?”
“잘 모르겠다.”
참 처참하죠. 내가 내 가족의 죽음을 납득시키고 인정을 받아야 한다니…. 희생자 가족이 그런 노력을 해야 하는 겁니다. 어떤 분들은 한 달 정도 자기 가족이 탄 지하철역 앞에 팻말을 들고 전화번호를 적어서 본 사람이 있으면 연락을 달라고 서 있기도 했어요.
어떤 가족들은 직접 유해를 찾겠다고 나섰습니다. 대구시와 대구지하철공사가 사고 현장에 물청소했다고 했잖아요? 청소 과정에서 혹시 유해나 유품이 훼손된 것은 아닌가 싶어 사고가 난 중앙로역에서 사고 지하철이 보관된 안심기지창까지 철길을 따라 일일이 불빛을 비춰가면서 혹시 떨어진 유해가 없는지 찾아 헤맸습니다. 대구시가 분류해 놓은 쓰레기 더미도 뒤졌습니다. 그렇게 하며 유골 스물일곱 점을 희생자 가족들이 직접 찾아냈습니다. 희생자 한 분은 수습된 시신이 오른쪽 무릎 뼈 단 한 점인데 그 유해를 가족들이 그 쓰레기 더미에서 발견했습니다. 가족들이 나서서 찾지 않았다면 그분은 피해자로 인정받지 못했을 겁니다.
당시 희생자 가족들은 어떻게든 가족들을 찾겠다고 하고 있는데 대구시에서는 가족들을 지원하기는커녕 우리가 유별나게 군다며 빨리 집에 가라고 했습니다. 맨바닥에서 지내다가 언론에서 비판하니 그제야 스티로폼을 깔아줬습니다. 담요도 희생자들이 항의하니 챙겨주기 시작했는데 희생자 가족은 300명인데 고작 70여 장을 가져왔더라고요… 생각해보세요? 누가 가족을 잃고 그런 생활을 하고, 그런 대우를 받고 싶겠습니까?
한 번은 제가 맨바닥에서 잠을 자는데 옆에 계시던 할머니가 저를 찍은 사진을 보여주더라고요. 제가 옆으로 누워서 몸을 바짝 오므리고 잔다고. 그렇게 자면 문제가 생기니 똑바로 자거나 편안한 방에 들어가서 자라고. 하지만 당시에는 그렇게 지내는 게 더 편했어요. 가족 대부분이 불면증을 겪습니다. 저도 그렇고요. 아내와 딸 생각을 하다 보면 잠이 잘 안 와요. 피로가 누적돼 몸이 제대로 가눠지지 않아야 잠을 자는 거죠. 지금은 그게 습관이 되었습니다. 자려고 해도 잠을 못자요. 졸려서 침대로 몸을 옮기면 정신이 멀쩡해집니다.
여러 일들을 겪으면서 우리나라에 대해서, 특히 참사에 대해서 생각이 많이 바뀌었습니다. 이 나라가 참 끔찍한 나라구나… 시도 정부도 참사를 책임지지 않는구나… 그 피해자들을 신경을 쓰지 않는구나… 우리 가족들만 이런 일을 겪은 게 아닙니다. 과거에도 지금도 별반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유가족들이 가장 많이 듣는 말이 보상금을 많이 받지 않았느냐, 너무 심하게 행동하고 요구하는 거 아니냐 말입니다. 하지만 누구든지 주변 사람의 죽음을 겪는다면 제가 경험해왔고, 지금 겪고 있는 절망감을 똑같이 느낄 겁니다.
임성은(청강문화산업대학교), 2005, 전하고 싶은 마음
📝정리: 장하엽, 유해정
📒 2.18대구지하철 화재 참사
2.18대구지하철 화재 참사는 2003년 2월 18일 대구 중앙로역에서 발생한 화재로 최소 192명이 희생되고, 21명이 실종됐으며, 151명이 다친 사건이다. 방화로 화재가 발생했으나 불쏘시개와 다를 바 없는 전동차 내장재, 1인 승무원제, 대구시와 대구지하철공사의 미흡한 초기 대처가 피해와 고통을 키웠다. 참사가 발생한 지 23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희생자들의 추모 문제는 해결되지 못했다.
우리 곁에서 함께 살아가고 있는 재난 피해자들의 이야기를 담습니다.
이들의 이야기가 마음의 징검다리를 건너 널리, 깊게, 그리고 오래 기억되기를 바랍니다.
이번 [마주, 봄]은 재난피해자권리센터 '우리함께'가 청강문화산업대학교 애니매이션학과와 함께 진행 중인 '참사와 서사' 수업에서 전재영님이 나눠주신 이야기를 정리해 재구성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