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해설
슬픔과 애도는 하나의 얼굴이 아니다.
엄기호 (청강문화산업대학교 교수)
“얼마나 슬프십니까?” 상실을 경험한 사람들에게 가장 많이 하는 말이다. 다시는 만나지도 되찾지도 못하는 그 슬픔 앞에서 사람들은 하나같이 말한다. 그 슬픔을 자기는 가늠할 수도, 상상할 수도 없다고 말이다. 그것이야말로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우주를 잃어버린 사람 앞에서 할 수 있는 가장 비통하고, 겸손한 말이라고 생각한다. 상실을 경험한 자는 그 말 앞에서 아무런 말도 할 수 없다. 그저 울 수밖에 없다. 그 울음을 보며 말을 건넨 사람은 역시 그 슬픔은 말할 수 없는 것이라고 고개를 끄덕이며 “다 안다”며 상실한 사람을 포옹한다.
그 슬픔이 말할 수 없다는 것을 안다는 사람 앞에서 자신의 슬픔을 말해야 하는 사람은 침묵할 수밖에 없다. 그가 입 밖으로 내놓는 그 어떠한 말도 고통의 신음과 말할 수 없는 침묵을 깨는 불순한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는 오로지 흐느끼고 침묵함으로써만 순수하게 ‘상실한 존재’가 될 수 있다. 그가 말을 하는 순간부터 그는 ‘상실한 존재’로서의 자격을 상실하게 된다. 그는 철저하게 ‘말할 수 없는 자’로서만 존재해야 한다. 말은 없고 흐느끼는 소리로만 존재하며 무너져 가야 하는 자, 이것이 소위 말하는 ‘피해자다움’의 핵심이다.
이 포옹이 무서운 것은 상실한 이가 다른 얼굴을 할 수 없으며 다른 말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오직 무너짐이라는 하나의 얼굴과 흐느낌이라는 하나의 소리만 존재할 수 있다. 다른 얼굴과 다른 말은 죽음과 상실 앞에서 취해서는 안 되는 ‘몹쓸 것’이 된다. 이미 많은 유가족들이 말하지 않았던가. 밥을 먹으면 자식 죽음 앞에서 밥이 목에 넘어가는 모양이라고 쑥덕거리고, 입시를 보면 동생의 죽음 앞에서 공부를 하다니 독한다고 수군거린다. 상실과 슬픔의 다른 강도, 다른 표정, 다른 말은 불경스러운 것이라 금지된다. 포옹은 이들이 자신의 슬픔을 말하는 것을 박탈했다.
그러나 우리가 만난 피해자/생존자는 달랐다. 그들의 슬픔은 다양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나아가 그들의 이야기는 그저 상실과 슬픈 이야기가 아니라 다른 이야기와 섞여있는 이야기였다. 한 어머니의 이야기는 똥구멍 찢어지게 가난하여 고향에서 쫓겨나듯 서울로 올라오는 가난에 대한 ‘자신’의 이야기와 섞여 있었고, 또 다른 동생의 이야기는 사망한 언니가 아니라 자기도 바라봐줄 것을 요구하는 이야기와 합쳐져 있었다. 죽음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산 자의 욕망도 이야기로 들려져야 한다고 요구한다. 이들의 이야기는 여러 얼굴과 목소리, 슬픔의 강도를 가진 다(多)의 이야기이며, 이전과 이후, 죽은 이만이 아니라 자기와 주변의 이야기와 섞여 있는 잡(雜)한 이야기였다.
다多와 잡雜. 그런 점에서 이들의 이야기는 책과 같다. 일본의 사상가 사사키 아타루는 책은 읽을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한다. 접혀져 보관되는 책이 펼칠 때마다 다른 이야기를 들려주기 때문이다. 어디를 펼쳐 시작하는지에 따라 같은 이야기가 다른 이야기가 된다. 거기 이 책을 펼치기 전에 읽어 머리속에 남은 다른 이야기와 섞여 또 다른 이야기를 펼쳐낸다. 그렇기에 책은 꺼낼 때마다 다른 책이 되어 펼쳐진다. 거기에는 어디에도 “내 그 마음 다 안다”는 말이 존재할 수 없다.
그러기에 덥석 안기부터 하는 애도는 책을 펼치기를 거부한다. 다 안다고 말하며 한 번도 펼치지 않은 채 그저 그 책을 책장에 꽂아버린다. 책장에 들어가는 순간 읽혀져서는 안 되는 책이 된다. 자신의 상실과 애도에 대해 “얼마나 슬프냐”는 말로 “내 그 다음 다 안다”는 말로 침묵당한 이들의 슬픔은 말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읽혀지기를 외면당한 ‘책’이다.
그러나 이 책들은 가만히 있지 않는다. 불쌍하게 가만히 책장에 꽂혀 있지만은 않는다. 한 번도 읽혀지지 않은 책은 이탈리아의 철학자 조르조 아감벤의 말을 빌린다면 누군가 와서 읽어주기를 기다리고만 있는 책이 아니다. 오히려 이 책들은 읽을 것을 요구한다. 자신의 꺼내서 읽는 것이 애도라고 요구한다. 슬픔을 책으로 대하는 것이 애도라고 요구한다. 꺼내서 펼쳐 읽고, 한번 읽고 마는 것이 아니라 다시 펼쳐 다른 이야기로 읽을 것을 요구한다. 여기에 당신이 이 책을 읽기 전 읽은 것과 합쳐질 때 어떤 새로운 이야기로 읽혀지는지를 말해달라고 요구한다. 따라서 읽으라는 요구는 그저 겸손하게 읽기만/듣기만 하라는 말이 아니라 당신의 이야기와 합쳐 다多와 잡雜으로 뻗어나가는 새로운 이야기를 펼치라는 요구다.
이번 전시에서는 청강문화산업대학교에서 만화를 그리는 여섯 명의 학생 작가들이 2025년 1학기 내내 피해자와 생존자를 만나 그들의 슬픔을 책으로 읽고 또 읽은 결과다. 우리가 만나 들은 그들의 이야기는 전부 상실된 자의 모습, 상실한 자를 대하는 자의 모습에 위배되는 이야기들이다. 상실한 자는 침묵해야 하고, 상실한 자를 대하는 자는 그 절대적 슬픔 앞에서 그저 곁을 지키며 또 침묵해야 한다는 그 명령에 반하는 불경스러운 이야기들이었다. 그 다하고 잡한 이야기에 학생 작가들은 그들의 말들이 떠오르게 한 상상과 자신의 이야기를 보탰다. 이를 통해 애도의 순수성에 짓눌려 침묵당한 그 다하고 잡한 얼굴과 말들이 튀어나오게 하여 이 전시작들을 완성하였다.
먼저 이다원은 가족을 잃었지만 슬픔에 무너지지 않고 덤덤하게 자신의 슬픔에 대해 말을 하는 바람에 슬픔이 부정당한 사람의 이야기다. 무너지지 않으면 슬픔이 아닌 것인가? 슬픔에 무너진 사람만이 슬픔의 이야기에 등장할 자격이 있는가? 이다원의 작품은 이런 질문을 던진다.
두 번째 신종태는 무너졌지만 옆에 더 무너진 사람이 있을 때 버티는 사람, 그 사람이 삼킨 말에 대한 이야기다. 삼킨 말을 하지 못했다는 것 때문에 무너지고 삼켜지는 것이 아니라 그 삼킨 말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말을 돌려줄 자를 잃어버렸다고 영원히 돌려주지 못하고 돌렵받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여전히 누군가에게 돌려줄 있으며, 생각하지도 못한 사람에게서 돌려받는다.
세 번째 박서진과 황정인은 무너진 자의 곁에 선 사람이 무너진 자에게 자신의 슬픔을 읽어줄 것을 요구하는 책이다. 무너진 자가 언젠가는 회복하고 일어나 그 곁의 슬픔을 읽어줄 것이라고 기다리는 것이 아니다. 아감벤의 말처럼 읽혀지지 않은 책은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요구한다. 이 두 이야기에서 곁은 읽어주기를 요구하는 책으로 등장한다. 그리고 그렇게 곁의 책을 읽음으로써 무너지는 자는 읽혀지기만 하는 책이 아니라 읽는 자로서 회복된다.
네 번째 김수연과 무니는 피해자가 읽혀지기만 할 뿐이라 읽혀지기를 거부하던 책에서 읽는 자로의 회복이 어떻게 일어나는지를 보여준다. 읽혀지기만 하는 존재는 얼핏 보면 따뜻하게 위로받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것보다 더 비참한 것은 없다. 그는 그저 남들에게 발가벗겨진 채 펼쳐져 있는 책일 뿐이다. 그것도 거기 무엇이 써져 있는지 뻔히 다 아는 책 말이다. 그렇기에 그들은 차라리 닫힌 책이 되기를 바란다. 그 닫힌 책이 어떻게 기꺼이 열린 책이 되는지를 보여준다.
다섯 번째로 임성은은 산 이와 죽은 이의 애도와 위로가 한 방향일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한강 작가는 산 사람이 죽은 사람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죽은 이가 산 이를 구원한다고 말했다. 이 작품은 그 의미를 정확하게 보여준다. 떠나보낼 수 없는 자의 슬픔, 그 슬픔을 딛을 때까지 위로하며 곁에 있는 죽은 이. 그러나 죽은 이는 또한 산 이가 고개를 들기를 바란다. 그 때 죽은 이는 말할 것이다. 고맙다고. 그리고 이제 떠나겠다고 말이다. 애도는 떠나보내는 행위다.
여섯 번째로 비명은 책을 파괴하는 자들에게 맞서며 애도는 읽는 것이라는 점을 분명하게 요구한다. 이 책은 읽을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이 책을 읽는 순간 오염되기 때문에 이런 책은 읽어서는 안 되며, 외면하고 파괴해야 한다고 말한다. 책을 파괴하는 것이, 읽지 않는 것이 신과 역사의 뜻을 읽는 것이라고 협박한다. 그러나 읽지 않아야 읽는 것이라는 이 무지의 강요에 맞서 오직 읽는 것이 구원이라는 깨달음에 도달하는 그 기적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정시현의 작품은 참사를 경험하더라도 살아가는 한 일상은 강력한 회복탄성력을 가지고 재건되지만 그것을 당연하게 여겨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새로운 이야기는 당연한 것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으려는 마음, 당연해져서는 안되는데 당연해진 것을 정면으로 응시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이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되는 순간 질문에 붙여지는 것은 삶이 아니라 그렇게 회복 탄력성을 통해 당연할 수 없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개인이 적응하도록 내버려 두는 무책임한 사회가 된다.
호밬의 이야기는 “다녀올께요”라는 말을 하고 나간 자식으로부터 “다녀왔어요”라는 말을 돌려받지 못해 아직 애도할 수 없는 세월호 유가족에 대한 이야기다. 이 말을 돌려받지 못한 사람들이 한을 품는다. 한은 죽은 사람이 아니라 산 사람의 몫이다. 이 산 사람의 한이 풀리지 않는 한 죽은 이는 떠나지 못하고 오히려 “가만히 있지 않겠습니다”는 팻말을 들고 나갔다 돌아오는 가족을 “다녀왔어”라고 맞이한다. 돌려받지 못한 것에 대한 사과의 말, <죄송합니다>를 듣기 전까지 이들은 떠나지 못한다.
안미르는 청년들의 경험에서 한국 현대사는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탈출과 구조라는 키워드로 조망한다. 어린 시절 세월호를 통한 같은 또래의 죽음과 탈출 불가능성에 대한 경험은 촛불 시위장으로 주인공을 향하게 한다. 거기서 주인공은 35년전 광주민주화운동 역시 구조를 기대할 수 없었던 사건으로 만난다. 가능하누것은 개인이 힘껏 탈출하는 것 뿐이지만 몇년 후 이태원에서 탈출조차 불가능한 사회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 모든 악몽이 나이 스물셋을 앞두고 일어났다고 미르는 말한다. 평생 하나도 경험하기 힘든 악몽을 스물셋이 되기 전에 반복해서 경험한 이들 앞에서 다시 묻지 않을 수 없다. “이게 과연 나라인가?”
강예나의 작품은 서로 아픈손가락일 수밖에 없는 참사의 당사자들이 서로에게 곁이 된다는 것은 서로에게 세계가 되어주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세계로 나갈 수 있도록 축복하고 용기를 북돋아 주는 일이라는 것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서로의 마음을 헤아리기 위해 서로의 눈을 바라보는 것만이 아니라 서로가 보고 있는 곳을 같이 봐야 한다. 서로의 눈에 자신의 모습을 담으려고만 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눈에 비친 그가 바라보고 있는 세계를 바라봐야 한다. 서로의 세계의 곁에 서는 것이지 곁이 세계를 대체하여 파괴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전시를 통해 우리는 감히 한 번도 읽혀지지 않은 것을 썼다고 주장하려는 것은 아니다. 이 이야기들은 어디선가, 누군가에 의해, 끊임없이 말해지고, 쓰였고, 읽혀지기를 요구했었다. 다만 우리는 슬픔은 말할 수 없는 것이라는 말로 처음부터 읽기를 거부하는, 읽지 않아도 다 안다는 그 말의 오만함과 게으름에 도전하려고 한다. 슬픔은 말할 수 없다는 말은 말하지 말라는 말이 아니다. 그것은 멈추라는 말이 아니라 끊임없이 읽고 말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애도는 읽고 주석을 다는 일이다. 여기 이 전시에 선보이는 작품도 그렇게 피해자와 생존자들의 이야기를 우리 학생 작가들이 읽고 단 주석이다. 독자관객들이 여기에 또 주석을 달아 이야기가 끊어지지 않으며 다른 이야기로 뻗어나가기를 바란다.
김수연
걷기위해서김수연
김수연
빈 손김수연
무니
잊고 있던 것은무니
박서진
각자의 현재박서진
비명
애도의 조건비명
신종태
한 마디신종태
이다원
괜찮은 이의 이야기이다원
임성은
전하고 싶은 마음임성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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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시현
당연한 것정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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