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약한 자들의 애도



엄기호

(청강문화산업대학교 미래원/만화콘텐츠스쿨)



재난피해자권리센터 우리함께와 공동으로 준비한 ‘참사와 서사’ 수업이 올해로 3년째에 이르렀다.

지난 2년간 재난의 사회적 성격과 재난 피해자들이 그저 비참한 상태에 있는 것이 아니라

피해자라는 ‘운명’을 대면하는 비극적 주체임을 드러 내는 창작에 몰두하였다면

이번 수업에서는 그들 중에서도 취약한 사람들의 애도 에 집중해 보기로 했다.

조금 거창하게 말하면 나는 이번 수업에서 학생들과 함께 소외된 사회적 재난에서도

소외된 당사자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취약한 자들의 애 도의 본질을 공부하여 그 형상을 깎아보고 싶었다.


형상을 부여하는 것은 예술적 창의성의 핵심에 속한다.

예를 들어 보자. 하얀 대 리석을 볼 때 일반인의 눈에는 그저 ‘돌덩어리’에 불과하지만,

미켈란젤로의 눈에 는 이미 그 안에 다비드가 있고 피에타가 있다.

그는 그 돌을 보며 피에타의 본질을 드러내는 형상을 조각한다.

피에타의 형상에 드러난 것은 성모가 예수를 안고 있는 객관적 모습이 아니라

세계의 구원을 위해 희생양이 된 당신의 아들을 안은 성모의 슬픔과 인내라는 ‘본질’이다.

우리의 작업을 감히 미켈란젤로에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수준에서건 예술의 지향이 그렇다는 것이다.


애도는 사람을 취약하게 만든다.

사랑하는 이의 죽음은 남겨진 이에게 회복 불 가한 상실의 상처를 남긴다.

그와 함께 했던 세계가 사라져 버린다.

아무리 애통 해한다고 하더라도 그 세계는 돌아오지 않는다.

그런데 냉정하게도 그의 상실에는 서열이 매겨진다.

나이 든 사람의 죽음보다는 어린 죽음이 더 안타깝게 여겨진다.

더 애통한 죽음 앞에서 그렇지 않은 죽음은 조용히 옆으로 밀려난다.

한국처럼 성적이 한 사람에 대한 가치의 전부를 이야기하는 나라에서는

모범생이 아닌 청소년의 죽음은 사회적으로 애도할 가치가 없는 죽음으로 치워진다.

이렇게 밀 려난 죽음을 애도해야 하는 사람들은 더욱 취약하다.


1999년에 일어난 인천 인현동 화재 사건은 화재로 인해 많은 희생자가 발생한 곳이

호프집이라는 이유로 피해자들에게 ‘불량’ 청소년이라는 낙인을 찍었다.

화재의 원인과 대처에서 드러난 문제점보다 ‘호프집’만 부각되면서 피해자들에게 책임을 전가하였다.

더구나 호프집에서 ‘알바노동’을 하던 청소년 피해자는 손님이 아니라

종업원이었다는 이유로 피해자가 아니라 가해자로 분류되어 보상 대상에서도 제외되었다.

한국 사회에서 애도의 자격이 얼마나 서열화되어 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준 사건이다.


세월호 참사에서도 찾을 수 있다.

온 국민을 비탄에 빠뜨린 세월호에 단원고등학교 학생들이 아닌 희생자도 있었다.

43명의 ‘일반인’ 피해자라고 불리는 분들이다.

이분들에 대한 애도는 상대적으로 보이지 않았고 일반인 희생자 유가족들 역시 애도의 자리를 단원고에 더 내주었다.

“나도 슬프지만 자식을 잃은 부모의 심정이 오죽하겠냐?”는 마음으로 뒤로 조금 물러섰지만,

이들의 애통함이라고 어떻게 다를 수 있겠는가.

취약한 자들의 애도라는 관점에서 우리 학생들이라도 이분들의 이야기를 위한 자리를 마련해 보자고 했다.


아리셀 화재 참사는 이 수업에서 처음으로 만나는 산업재해였다.

3년이 되면서 사회적 재난의 범주를 좀 더 구조적인 측면으로 확장하려고 하였고

필연적으로 산업재해를 만나게 되었다. 안전의 문제가 사회 구조 및 국가 정책에 직결된 것이

바로 산업재해이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취약한 이들이 이주노동자들이었다.

이들이 겪는 산업재해와 그 유가족들의 비통함에 어떤 형상을

부여할 수 있을지를 학생 작가들은 수업에서 고민했다.


또 하나 확장의 차원에서 만난 것이 기후 위기에 따른 사회적 재난으로서의 자연재해였다.

작년 영남 지역을 휩쓸었던 산불은 기후 위기, 인간의 부주의, 대처하는 과정에서의 문제점,

그리고 무엇보다 사후에 이재민들의 생계와 생활 대책 에서 많은 문제점을 드러냈다.

대부분 피해자가 고령의 지역민들이었고 이들이 잃어버린 것은 삶의 터전을 넘어 그들이 살아온 역사와 근거 자체였다.

무엇을 잃어버렸다고 이야기를 만들 것인지 학생들은 고심하며 증언을 들었다.


무안공항 제주항공 참사에서는 세대를 아우르는 피해자들을 만났다.

외국에서 근무하는 아버지/남편은 연말을 맞은 가족 여행 후에 온 가족을 잃었다.

부모님 효도 여행을 보냈던 아들과 딸은 부모님을 한 번에 잃었다.

부모님 두 분의 여행을 배웅하고 돌아왔던 청년들도 하루아침에 부모님 모두가 돌아가시는 참변을 당했다.

세대의 차이가 뚜렷하게 드러나는 슬픔의 증언을 들으며 어떤 이야기

사회적 메시지가 담긴 애도가 될 수 있을지를 함께 고민했다.




먼저 loo소 작가의 <잿빛 나무>는 영남 산불을 다룬다.

하루아침에 삶의 터전 을 잃고 도시에 있는 자식의 집에 머물며

‘나무’를 걱정하던 할머니가 손녀와 함께 불에 타버린 집을 찾아가는 이야기다.

손녀는 할머니와 동행하면 할머니에게 ‘나무’는 그저 나무 한 그루가 아니라

할머니의 ‘세월’ 그 자체였음을 알게 된다. 손녀는 할머니가 타버린 나무를 만지다 묻은 그을림을 털어주려다 멈춘다.

그것은 감히 자기가 함부로 손댈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아무리 치밀한 사이라고 하더라도 타자의 슬픔에 다가서는 윤리가 무엇인지에 대해 우리에게 말해준다.


문하영 작가의 <아기새>는 아리셀 화재 참사 이주민 피해자의 이야기를 빼어나게 형상화했다.

시작하는 장면에서부터 낯선 곳에 와 있는 사람의 불안을 말 한 마디 없이 명확하게 드러낸다.

이주민에게 낯선 세계인 이곳의 “보도블럭 감촉조차 이상”하다는 것을 잘 표현하고 있다.

아기새처럼 자기가 의지할 수 있는 사람 을 쫓아다닌다.

공장의 사람들 역시 호의를 가지고 대해주지만 화재가 발생하자 그가 의지할 곳은 없다.

딸의 죽음 이후 역시 이주민인 어머니는 딸을 그리워하며 술을 마시면

자기도 모르게 취한 채 딸이 죽은 공장 앞에 가 있다.

취한 그를 신생 아처럼 부축해서 돌아오며 남편/아버지는 말한다. 집에 가야지.


태서 작가의 <안녕>은 피해자의 감정을 방향을 통해 짜임새 있게 구조화하였다.

항공기 참사로 부모를 잃은 주인공은 하늘을 볼 수 없다. 하늘이 자기를 짓누르고 있는 것 같기 때문이다.

또한 앞을 볼 수 없다. 앞을 보면 부모님이 어른거리기 때문에 늘 사고의 위험에 처했다.

그래서 그는 바닥만 보고 있다.

그 바닥에서 주인 공은 부모님의 죽음으로 자기가 망각하고 있던 강아지를 보게 된다.

강아지에 대한 책임으로 바깥에 나간 그는 뛰어가는 강아지를 잡기 위해 앞을 보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언덕 위에서 다시 강아지를 찾은 그는 하늘을 마주하고 부모님과 작 별한다.

그에게는 살아야할 이유가 있으며 그 이유를 그는 번쩍 자신의 눈 앞으로 들어올린다.


여은수 작가의 <타고 멀리>는 세월호 일반인 희생자 유가족의 이야기다.

관절이 좋지 않았던 어머니는 운동을 위해 자전거 동호회에 가입한다.

모처럼 어머니가 운동을 통해 삶의 활기를 되찾자, 그는 새 자전거를 선물하며

어머니의 제주도 동호회 여행에 참여할 것을 권유했다가 참사를 당한다.

참사 해결을 위하는 과정에서 그는 생활고도 경험하고 또 친척 형의 자녀가

이태원에서 참사를 당하는 고 통도 겪게 된다. 그가 겪는 이 후회와 고통,

그리고 인내의 과정을 여은수 작가는 빼어나게 하나의 이야기로 엮어냈다.


이방 작가의 <언제나 함께>는 인천 인현동 화재 사건 희생자의 오빠 이야기를 군더더기 하나 없이 전해준다.

사건 당일 용돈 좀 달라는 동생에게 ‘아까워서’ 오 만원이 아니라 만원만 준 것이 그에게는 평생의 후회가 된다.

동생의 죽음 이후 그가 경험한 것은 불량 청소년이라는 낙인과 그에 따른 사회적 냉대와 차별이었다.

택시에서부터 음식점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의 입방아는 동생의 명예를 무참하게 짓밟았다.

동생의 명예를 위해 동분서주하는 그와 함께 한 것은 동생의 친구들 쉽지 않은 수업이었다.

사람들이 흔히 마음에 담고 있는 피해자와 유가족이 아이었다.

그들과 함께 견딘 시간은 달팽이처럼 느리게 갔지만 결국 명예회복을 위한 조례 제정으로 열매를 맺게 된다.

동생과, 어머니와, 그리고 동생의 친구들과 ‘언제나 함께’ 였기에 가능했다.


능봄 작가의 <나는 개구리가 되었다>는 젊은 유가족들이 경험하는 낯섦에 대해 초대한다.

사회적 참사의 피해자들은 서로 뜨겁게 연대하는 경향이 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그 애통함을 알고 함께 할 수 있는 것은 같은 당사자들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회적 참사가 벌어지면 다른 참사의 피해자들이 찾아와 “내 그 마음 다 안다”며 손을 마주 잡는다.

그러나 이 뜨거운 포옹은 많은 젊은 세대에게 는 너무 낯선 경험이다. 너무 뜨겁다.

그분들에 비해 나는 그렇게 뜨거울 수 있을 것 같지 않은 마음이 숨이 막히게도 한다.

너무 차가운 세계와 너무 뜨거운 연대 의 공간, 어디에도 머물지 못하고 경계에 있는

이들의 이야기를 ‘개구리’라는 은유 로 형상화하였다.


이비수 작가의 <남겨진 것은>은 슬픔과 고통의 앵글을 돌려본 작품이다.

일반적으로 참사의 유가족들 중에서 가장 애통하고 고통에 삶이 무너지는 사람은 부 모님이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는 무너진 형제의 이야기를 다룬다. 형제의 죽음 앞에서

주인공은 죽음에 대한 공포에 짓눌린다. 형제뿐만 아니라 어머니와 자기가 사랑하는

모든 이들을 잃을지 모른다는 공포에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 상태가 된다.

이런 자식을 바라보는 어머니는 자신의 슬픔에 잠길 여유가 없이 공황인 딸을 돌봐야 한다.

슬픔과 슬픔이 만나지 못하고 비껴가는 비극이야말로 참사가 만들 어내는 참사라는 것을 이비수 작가는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마지막으로 박연수 작가의 작품은 그림책이다.

이 그림책은 사랑하는 이를 잃은 유가족들의 마음과 애쓺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유가족들의 소원은 꿈에 서라도 사랑하는 이를 한 번 더 보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삶은 잠들 수 없는 삶이다.

사랑하는 이가 잊혀지지 않게 하기 위해 부르는 곳이라면 어디든 달려가서 이야기를 나눠야 한다.

또한 누가 어디서 이들의 죽음을 모욕하고 혐오할지 모른다. 사랑하는 이의 존엄과 기억을 위해

이들은 잠들지 못하고 늘 깨어있어야 한다. 꿈에서라도 사랑하는 이를 만나고 싶지만,

기억을 위해 잠들 수 없는 것이 유가족의 가장 큰 비극이다. 

박연수 작가는 함께 기억하는 것을 통해 이들이 잠들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을 아름다운 그림으로 담았다.


쉽지 않은 수업이었다. 사람들이 흔히 마음에 담고 있는 피해자와 유가족이 아니

 주변화된 애도의 운명을 온몸으로 받아내는 분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학생 작가들은

자신들의 머릿속에 한번도 존재한 적이 없는 어떤 형상을 그려내야 했다.

수업하는 내내 과연 이 낯선 이야기에서 형상을 찾아낼 수 있을지 걱정하였지만

애도하고자 하는 학생 작가들의 마음이 정성스럽게 이런 창작물로 태어났다.

학생 작가들에게 감사의 말을 전한다.

그리고 3년째 함께 수업과 전시를 준비하고 있는 재난피해자권리센터 우리함께와

물심양면으로 수업을 지지해준 청강문화산업대학교 구성원 모두에게도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덕분에, 수업도 창작도 작품 집도 전시도 그리고 내일의 도모도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청강문화산업대학교 미래원/만화콘텐츠스쿨 엄기호 드림 




취약한 자들의 애도





엄기호

(청강문화산업대학교 미래원/만화콘텐츠스쿨)







재난피해자권리센터 우리함께와 공동으로 준비한 ‘참사와 서사’ 수업이 올해로 3년째에 이르렀다.

지난 2년간 재난의 사회적 성격과 재난 피해자들이 그저 비참한 상태에 있는 것이 아니라

피해자라는 ‘운명’을 대면하는 비극적 주체임을 드러 내는 창작에 몰두하였다면

이번 수업에서는 그들 중에서도 취약한 사람들의 애도 에 집중해 보기로 했다.

조금 거창하게 말하면 나는 이번 수업에서 학생들과 함께 소외된 사회적 재난에서도

소외된 당사자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취약한 자들의 애 도의 본질을 공부하여 그 형상을 깎아보고 싶었다.


형상을 부여하는 것은 예술적 창의성의 핵심에 속한다.

예를 들어 보자. 하얀 대 리석을 볼 때 일반인의 눈에는 그저 ‘돌덩어리’에 불과하지만,

미켈란젤로의 눈에 는 이미 그 안에 다비드가 있고 피에타가 있다.

그는 그 돌을 보며 피에타의 본질을 드러내는 형상을 조각한다.

피에타의 형상에 드러난 것은 성모가 예수를 안고 있는 객관적 모습이 아니라

세계의 구원을 위해 희생양이 된 당신의 아들을 안은 성모의 슬픔과 인내라는 ‘본질’이다.

우리의 작업을 감히 미켈란젤로에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수준에서건 예술의 지향이 그렇다는 것이다.


애도는 사람을 취약하게 만든다.

사랑하는 이의 죽음은 남겨진 이에게 회복 불 가한 상실의 상처를 남긴다.

그와 함께 했던 세계가 사라져 버린다.

아무리 애통 해한다고 하더라도 그 세계는 돌아오지 않는다.

그런데 냉정하게도 그의 상실에는 서열이 매겨진다.

나이 든 사람의 죽음보다는 어린 죽음이 더 안타깝게 여겨진다.

더 애통한 죽음 앞에서 그렇지 않은 죽음은 조용히 옆으로 밀려난다.

한국처럼 성적이 한 사람에 대한 가치의 전부를 이야기하는 나라에서는

모범생이 아닌 청소년의 죽음은 사회적으로 애도할 가치가 없는 죽음으로 치워진다.

이렇게 밀 려난 죽음을 애도해야 하는 사람들은 더욱 취약하다.


1999년에 일어난 인천 인현동 화재 사건은 화재로 인해 많은 희생자가 발생한 곳이

호프집이라는 이유로 피해자들에게 ‘불량’ 청소년이라는 낙인을 찍었다.

화재의 원인과 대처에서 드러난 문제점보다 ‘호프집’만 부각되면서 피해자들에게 책임을 전가하였다.

더구나 호프집에서 ‘알바노동’을 하던 청소년 피해자는 손님이 아니라

종업원이었다는 이유로 피해자가 아니라 가해자로 분류되어 보상 대상에서도 제외되었다.

한국 사회에서 애도의 자격이 얼마나 서열화되어 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준 사건이다.


세월호 참사에서도 찾을 수 있다.

온 국민을 비탄에 빠뜨린 세월호에 단원고등학교 학생들이 아닌 희생자도 있었다.

43명의 ‘일반인’ 피해자라고 불리는 분들이다.

이분들에 대한 애도는 상대적으로 보이지 않았고 일반인 희생자 유가족들 역시 애도의 자리를 단원고에 더 내주었다.

“나도 슬프지만 자식을 잃은 부모의 심정이 오죽하겠냐?”는 마음으로 뒤로 조금 물러섰지만,

이들의 애통함이라고 어떻게 다를 수 있겠는가.

취약한 자들의 애도라는 관점에서 우리 학생들이라도 이분들의 이야기를 위한 자리를 마련해 보자고 했다.


아리셀 화재 참사는 이 수업에서 처음으로 만나는 산업재해였다.

3년이 되면서 사회적 재난의 범주를 좀 더 구조적인 측면으로 확장하려고 하였고

필연적으로 산업재해를 만나게 되었다. 안전의 문제가 사회 구조 및 국가 정책에 직결된 것이

바로 산업재해이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취약한 이들이 이주노동자들이었다.

이들이 겪는 산업재해와 그 유가족들의 비통함에 어떤 형상을

부여할 수 있을지를 학생 작가들은 수업에서 고민했다.


또 하나 확장의 차원에서 만난 것이 기후 위기에 따른 사회적 재난으로서의 자연재해였다.

작년 영남 지역을 휩쓸었던 산불은 기후 위기, 인간의 부주의, 대처하는 과정에서의 문제점,

그리고 무엇보다 사후에 이재민들의 생계와 생활 대책 에서 많은 문제점을 드러냈다.

대부분 피해자가 고령의 지역민들이었고 이들이 잃어버린 것은 삶의 터전을 넘어 그들이 살아온 역사와 근거 자체였다.

무엇을 잃어버렸다고 이야기를 만들 것인지 학생들은 고심하며 증언을 들었다.


무안공항 제주항공 참사에서는 세대를 아우르는 피해자들을 만났다.

외국에서 근무하는 아버지/남편은 연말을 맞은 가족 여행 후에 온 가족을 잃었다.

부모님 효도 여행을 보냈던 아들과 딸은 부모님을 한 번에 잃었다.

부모님 두 분의 여행을 배웅하고 돌아왔던 청년들도 하루아침에 부모님 모두가 돌아가시는 참변을 당했다.

세대의 차이가 뚜렷하게 드러나는 슬픔의 증언을 들으며 어떤 이야기

사회적 메시지가 담긴 애도가 될 수 있을지를 함께 고민했다.




먼저 loo소 작가의 <잿빛 나무>는 영남 산불을 다룬다.

하루아침에 삶의 터전 을 잃고 도시에 있는 자식의 집에 머물며

‘나무’를 걱정하던 할머니가 손녀와 함께 불에 타버린 집을 찾아가는 이야기다.

손녀는 할머니와 동행하면 할머니에게 ‘나무’는 그저 나무 한 그루가 아니라

할머니의 ‘세월’ 그 자체였음을 알게 된다. 손녀는 할머니가 타버린 나무를 만지다 묻은 그을림을 털어주려다 멈춘다.

그것은 감히 자기가 함부로 손댈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아무리 치밀한 사이라고 하더라도 타자의 슬픔에 다가서는 윤리가 무엇인지에 대해 우리에게 말해준다.


문하영 작가의 <아기새>는 아리셀 화재 참사 이주민 피해자의 이야기를 빼어나게 형상화했다.

시작하는 장면에서부터 낯선 곳에 와 있는 사람의 불안을 말 한 마디 없이 명확하게 드러낸다.

이주민에게 낯선 세계인 이곳의 “보도블럭 감촉조차 이상”하다는 것을 잘 표현하고 있다.

아기새처럼 자기가 의지할 수 있는 사람 을 쫓아다닌다.

공장의 사람들 역시 호의를 가지고 대해주지만 화재가 발생하자 그가 의지할 곳은 없다.

딸의 죽음 이후 역시 이주민인 어머니는 딸을 그리워하며 술을 마시면

자기도 모르게 취한 채 딸이 죽은 공장 앞에 가 있다.

취한 그를 신생 아처럼 부축해서 돌아오며 남편/아버지는 말한다. 집에 가야지.


태서 작가의 <안녕>은 피해자의 감정을 방향을 통해 짜임새 있게 구조화하였다.

항공기 참사로 부모를 잃은 주인공은 하늘을 볼 수 없다. 하늘이 자기를 짓누르고 있는 것 같기 때문이다.

또한 앞을 볼 수 없다. 앞을 보면 부모님이 어른거리기 때문에 늘 사고의 위험에 처했다.

그래서 그는 바닥만 보고 있다.

그 바닥에서 주인 공은 부모님의 죽음으로 자기가 망각하고 있던 강아지를 보게 된다.

강아지에 대한 책임으로 바깥에 나간 그는 뛰어가는 강아지를 잡기 위해 앞을 보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언덕 위에서 다시 강아지를 찾은 그는 하늘을 마주하고 부모님과 작 별한다.

그에게는 살아야할 이유가 있으며 그 이유를 그는 번쩍 자신의 눈 앞으로 들어올린다.


여은수 작가의 <타고 멀리>는 세월호 일반인 희생자 유가족의 이야기다.

관절이 좋지 않았던 어머니는 운동을 위해 자전거 동호회에 가입한다.

모처럼 어머니가 운동을 통해 삶의 활기를 되찾자, 그는 새 자전거를 선물하며

어머니의 제주도 동호회 여행에 참여할 것을 권유했다가 참사를 당한다.

참사 해결을 위하는 과정에서 그는 생활고도 경험하고 또 친척 형의 자녀가

이태원에서 참사를 당하는 고 통도 겪게 된다. 그가 겪는 이 후회와 고통,

그리고 인내의 과정을 여은수 작가는 빼어나게 하나의 이야기로 엮어냈다.


이방 작가의 <언제나 함께>는 인천 인현동 화재 사건 희생자의 오빠 이야기를 군더더기 하나 없이 전해준다.

사건 당일 용돈 좀 달라는 동생에게 ‘아까워서’ 오 만원이 아니라 만원만 준 것이 그에게는 평생의 후회가 된다.

동생의 죽음 이후 그가 경험한 것은 불량 청소년이라는 낙인과 그에 따른 사회적 냉대와 차별이었다.

택시에서부터 음식점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의 입방아는 동생의 명예를 무참하게 짓밟았다.

동생의 명예를 위해 동분서주하는 그와 함께 한 것은 동생의 친구들 쉽지 않은 수업이었다.

사람들이 흔히 마음에 담고 있는 피해자와 유가족이 아이었다.

그들과 함께 견딘 시간은 달팽이처럼 느리게 갔지만 결국 명예회복을 위한 조례 제정으로 열매를 맺게 된다.

동생과, 어머니와, 그리고 동생의 친구들과 ‘언제나 함께’ 였기에 가능했다.


능봄 작가의 <나는 개구리가 되었다>는 젊은 유가족들이 경험하는 낯섦에 대해 초대한다.

사회적 참사의 피해자들은 서로 뜨겁게 연대하는 경향이 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그 애통함을 알고 함께 할 수 있는 것은 같은 당사자들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회적 참사가 벌어지면 다른 참사의 피해자들이 찾아와 “내 그 마음 다 안다”며 손을 마주 잡는다.

그러나 이 뜨거운 포옹은 많은 젊은 세대에게 는 너무 낯선 경험이다. 너무 뜨겁다.

그분들에 비해 나는 그렇게 뜨거울 수 있을 것 같지 않은 마음이 숨이 막히게도 한다.

너무 차가운 세계와 너무 뜨거운 연대 의 공간, 어디에도 머물지 못하고 경계에 있는

이들의 이야기를 ‘개구리’라는 은유 로 형상화하였다.


이비수 작가의 <남겨진 것은>은 슬픔과 고통의 앵글을 돌려본 작품이다.

일반적으로 참사의 유가족들 중에서 가장 애통하고 고통에 삶이 무너지는 사람은 부 모님이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는 무너진 형제의 이야기를 다룬다. 형제의 죽음 앞에서

주인공은 죽음에 대한 공포에 짓눌린다. 형제뿐만 아니라 어머니와 자기가 사랑하는

모든 이들을 잃을지 모른다는 공포에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 상태가 된다.

이런 자식을 바라보는 어머니는 자신의 슬픔에 잠길 여유가 없이 공황인 딸을 돌봐야 한다.

슬픔과 슬픔이 만나지 못하고 비껴가는 비극이야말로 참사가 만들 어내는 참사라는 것을 이비수 작가는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마지막으로 박연수 작가의 작품은 그림책이다.

이 그림책은 사랑하는 이를 잃은 유가족들의 마음과 애쓺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유가족들의 소원은 꿈에 서라도 사랑하는 이를 한 번 더 보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삶은 잠들 수 없는 삶이다.

사랑하는 이가 잊혀지지 않게 하기 위해 부르는 곳이라면 어디든 달려가서 이야기를 나눠야 한다.

또한 누가 어디서 이들의 죽음을 모욕하고 혐오할지 모른다. 사랑하는 이의 존엄과 기억을 위해

이들은 잠들지 못하고 늘 깨어있어야 한다. 꿈에서라도 사랑하는 이를 만나고 싶지만,

기억을 위해 잠들 수 없는 것이 유가족의 가장 큰 비극이다. 

박연수 작가는 함께 기억하는 것을 통해 이들이 잠들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을 아름다운 그림으로 담았다.


쉽지 않은 수업이었다. 사람들이 흔히 마음에 담고 있는 피해자와 유가족이 아니

 주변화된 애도의 운명을 온몸으로 받아내는 분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학생 작가들은

자신들의 머릿속에 한번도 존재한 적이 없는 어떤 형상을 그려내야 했다.

수업하는 내내 과연 이 낯선 이야기에서 형상을 찾아낼 수 있을지 걱정하였지만

애도하고자 하는 학생 작가들의 마음이 정성스럽게 이런 창작물로 태어났다.

학생 작가들에게 감사의 말을 전한다.

그리고 3년째 함께 수업과 전시를 준비하고 있는 재난피해자권리센터 우리함께와

물심양면으로 수업을 지지해준 청강문화산업대학교 구성원 모두에게도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덕분에, 수업도 창작도 작품 집도 전시도 그리고 내일의 도모도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청강문화산업대학교 미래원/만화콘텐츠스쿨 엄기호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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