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 안전 사회를 향한 이정표
2026년 <참사와 서사> 전시에 부쳐
유해정
(416재단 부설 재난피해자권리센터 ‘우리함께’ 센터장)
세상을 향해 열린 교실
재난피해자와 청년 창작자가 한 교실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한 지 세 해가 되었습니다.
재난피해자권리센터 ‘우리함께’와 청강문화산업대학교 만화콘텐츠스쿨 엄기호 교수가 의기투합해
2024년 처음 시도한 <참사와 서사>는 피해자가 자신의 경험과 삶을 직접 들려주고,
학생들이 그 이야기를 듣고 질문하며 새로운 서사로 만들어가는 수업입니다.
재난 이후 자신의 이야기를 공적으로 말하고 사회로부터 응답받을 기회가 충분하지 않았
피해자들에게 말하기와 만남의 공간을 열고, 미래의 창작자들이 피해자의 시선에서 재난을 바라보며
그들의 권리와 존엄에 대한 감수성을 키우는 것. 그것이 이 수업을 시작한 가장 중요한 이유였습니다.
재난을 사건명과 숫자로만 기억하지 않고, 그 안에 있었던 사람들의 삶으로 기억하기 위한 시도이기도 했습니다.
2026년, 세 번째 수업에는 특별히 최근 발생한 재난의 피해자들이 새롭게 함께했습니다.
2025년 경북 의성 산불 피해주민, 2024년 화성 아리셀 중대재해참사 이주민 유가족,
2024년 12·29 무안공항 제주항공 여객기 참사 청년과 장년 유가족이 자신의 경험을 학생들에게 들려주었습니다.
세월호참사 일반인 유가족과 단원고 생존자, 인천 인현동 화재참사 유가족 등
오랜 시간 재난 이후의 삶을 살아온 피해자들도 함께했습니다.
서로 다른 시간의 재난을 살아온 이들이 38명의 학생들과 한 교실에서 만났습니다.
재난이 일어난 시점은 달랐지만 이들 모두에게 재난은 여전히 과거의 일이 아니었습니다.
특히 최근 피해를 입은 이들에게는 상실과 이별이 아직 낯설고,
삶을 다시 꾸리기도 전에 감당해야 할 과제들이 한꺼번에 놓여 있었습니다.
삶터를 잃고 어디에서 다시 살아갈지 고민해야 하는 사람,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낸 지 얼마 되지 않아
진상을 묻고 책임을 요구해야 하는 사람, 자신의 삶을 추스를 겨를도 없이 사회를 향해 말해야 하는 사람들.
아직 익숙해질 수도, 정리될 수도 없는 시간을 지나고 있는 이들의 목소리가 올해 교실에 더욱 가까이 들어왔습니다.
학생들이 만난 것은 그렇게 아직 결말이 쓰이지 않은 삶이었습니다.
그 만남은 누군가의 고통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데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피해자가 무엇을 겪었는지만이 아니라, 그 경험에 우리는 어떻게 응답해야 하는지,
그 고통을 만들어내거나 키운 사회의 조건은 무엇인지,
같은 일이 되풀이되지 않으려면 무엇이 달라져야 하는지를 묻게 했습니다.
그 질문은 만화와 웹툰, 희곡 등 새로운 작품으로 이어졌습니다. 피해자의 기억과 상실,
애도와 살아남은 이후의 삶을 따라가며 작품들은 다시 우리에게 묻습니다.
재난 이후에도 피해자들이 공동체의 일원으로 존엄하게 살아갈 수 있으려면,
우리 사회는 이들의 말에 어떻게 응답하고 어떻게 함께해야 하는가.
기억이 더 넓은 사회와 만날 때
올해 달라진 것은 교실만이 아닙니다.
지난해 국회와 지방자치단체, 도서관과 시민의 공간을 찾아갔던 전시는
올해 대한민국 안전산업박람회와 생명안전비엔날레를 비롯해
더욱 다양한 시민들이 모이는 현장으로 나아갑니다.
재난과 피해자 문제에 이미 관심을 가진 사람들뿐 아니라 안전을 기술과 산업의 문제로 고민하는 사람들,
다른 관심으로 행사를 찾았다가 우연히 작품 앞에 서게 된 시민들과도 만나고자 합니다.
이를 위해 센터는 더 많은 자원과 역량을 투입하고 여러 기관·단체와의 협력을 넓혀가고 있습니다.
전시의 규모를 키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피해자의 이야기가 기억되고, 더 많은 사람에게 닿고, 다시 사회의 질문이 될 수 있는 공간을 넓히기 위해서입니다.
기억을 안전의 기준으로
올해 전시를 둘러싼 사회적 조건에도 중요한 변화가 있었습니다.
세월호참사 이후 수많은 재난참사 피해자와 시민들이 오랫동안 염원해온
생명안전기본법이 제정되고 국민생명안전위원회가 출범했습니다.
이제 우리 사회에는 안전을 국가가 베푸는 시혜나 운에 맡겨진 조건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보장되어야 할 권리로 바라볼 수 있는 기준이 마련되었습니다.
다양한 재난과 안전사고의 피해자에게 어떤 기본적 권리가 보장되어야 하는지 살피고,
그것이 실제로 지켜지고 있는지를 점검할 제도적 토대도 생겼습니다.
그래서 올해 전시의 제목을 <기억, 안전사회를 위한 이정표>라고 정했습니다.
기억은 과거를 되돌아보는 일에 머물지 않습니다.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잊지 않고,
피해자가 겪은 일을 사회의 경험으로 남겨 같은 고통이 반복되지 않도록 하는 일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기억은 더 안전한 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출발점이자 기준입니다.
생명안전기본법의 제정과 국민생명안전위원회의 출범 역시 안전사회의 완성을 뜻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새롭게 마련된 기준이 피해자의 실제 삶에서 어떻게 구현되는가입니다.
재난이 발생했을 때 피해자는 존엄한 시민으로 대우받고 있는가.
필요한 정보를 충분히 제공받고 있는가. 진실을 알고 책임을 물을 수 있는가.
애도하고 회복하며 자신의 삶을 다시 꾸려갈 수 있는가.
그리고 피해자의 경험과 목소리는 더 안전한 사회를 만드는 과정에 제대로 반영되고 있는가.
이번 전시의 작품들은 그 질문을 기억하게 하는 작은 이정표들입니다.
작품 속 한 사람의 삶을 따라가다 보면 재난은 한순간의 사고로 끝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묻게 됩니다. 우리는 무엇을 놓쳤는가. 그 사람에게 어떤 권리가 필요했는가.
같은 일이 되풀이되지 않기 위해 무엇을 바꾸어야 하는가.
그 질문이 전시장을 나선 뒤에도 오래 남기를 바랍니다.
피해자의 이야기를 안타까운 사연으로 기억하는 데 그치지 않고,
우리 사회의 안전을 돌아보고 바꾸는 기억으로 이어가 주시기를 바랍니다.
안전은 피해자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권리이며,
피해자의 경험은 우리가 더 안전한 사회로 나아가기 위해 반드시 기억해야 할 사회의 경험이기 때문입니다.
함께 세우는 이정표
세 해 동안 이 특별한 수업을 가능하게 해주신 재난피해자 여러분께 가장 먼저 깊은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자신의 아픈 경험을 다시 꺼내 청년들에게 건네주신 그 마음을 잊지 않겠습니다.
그 이야기를 진지하게 듣고 오래 톺아보며 작품으로 만들어준 청강문화산업대학교 학생들,
배움이 세상에 대한 질문과 응답으로 이어지도록 징검다리를 놓아주신 교수님,
그리고 각자의 자리에서 지식과 경험을 나누며 수업을 함께 만들어주신 전문가 여러분께도 깊이 감사드립니다.
또한 올해 전시가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힘과 자원을 보태고
기꺼이 함께해주신 여러 기관과 단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이 일을 준비해주신 모든 분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한 사람의 기억이 우리의 기억이 되고,
그 기억이 더 안전한 사회를 향한 이정표가 되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2026년 9월
기억,
안전 사회를
향한 이정표
2026년 <참사와 서사> 전시에 부쳐
유해정
(416재단 부설 재난피해자권리센터
‘우리함께’ 센터장)
세상을 향해 열린 교실
재난피해자와 청년 창작자가 한 교실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한 지 세 해가 되었습니다.
재난피해자권리센터 ‘우리함께’와 청강문화산업대학교 만화콘텐츠스쿨 엄기호 교수가 의기투합해
2024년 처음 시도한 <참사와 서사>는 피해자가 자신의 경험과 삶을 직접 들려주고,
학생들이 그 이야기를 듣고 질문하며 새로운 서사로 만들어가는 수업입니다.
재난 이후 자신의 이야기를 공적으로 말하고 사회로부터 응답받을 기회가 충분하지 않았
피해자들에게 말하기와 만남의 공간을 열고, 미래의 창작자들이 피해자의 시선에서 재난을 바라보며
그들의 권리와 존엄에 대한 감수성을 키우는 것. 그것이 이 수업을 시작한 가장 중요한 이유였습니다.
재난을 사건명과 숫자로만 기억하지 않고, 그 안에 있었던 사람들의 삶으로 기억하기 위한 시도이기도 했습니다.
2026년, 세 번째 수업에는 특별히 최근 발생한 재난의 피해자들이 새롭게 함께했습니다.
2025년 경북 의성 산불 피해주민, 2024년 화성 아리셀 중대재해참사 이주민 유가족,
2024년 12·29 무안공항 제주항공 여객기 참사 청년과 장년 유가족이 자신의 경험을 학생들에게 들려주었습니다.
세월호참사 일반인 유가족과 단원고 생존자, 인천 인현동 화재참사 유가족 등
오랜 시간 재난 이후의 삶을 살아온 피해자들도 함께했습니다.
서로 다른 시간의 재난을 살아온 이들이 38명의 학생들과 한 교실에서 만났습니다.
재난이 일어난 시점은 달랐지만 이들 모두에게 재난은 여전히 과거의 일이 아니었습니다.
특히 최근 피해를 입은 이들에게는 상실과 이별이 아직 낯설고,
삶을 다시 꾸리기도 전에 감당해야 할 과제들이 한꺼번에 놓여 있었습니다.
삶터를 잃고 어디에서 다시 살아갈지 고민해야 하는 사람,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낸 지 얼마 되지 않아
진상을 묻고 책임을 요구해야 하는 사람, 자신의 삶을 추스를 겨를도 없이 사회를 향해 말해야 하는 사람들.
아직 익숙해질 수도, 정리될 수도 없는 시간을 지나고 있는 이들의 목소리가 올해 교실에 더욱 가까이 들어왔습니다.
학생들이 만난 것은 그렇게 아직 결말이 쓰이지 않은 삶이었습니다.
그 만남은 누군가의 고통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데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피해자가 무엇을 겪었는지만이 아니라, 그 경험에 우리는 어떻게 응답해야 하는지,
그 고통을 만들어내거나 키운 사회의 조건은 무엇인지,
같은 일이 되풀이되지 않으려면 무엇이 달라져야 하는지를 묻게 했습니다.
그 질문은 만화와 웹툰, 희곡 등 새로운 작품으로 이어졌습니다. 피해자의 기억과 상실,
애도와 살아남은 이후의 삶을 따라가며 작품들은 다시 우리에게 묻습니다.
재난 이후에도 피해자들이 공동체의 일원으로 존엄하게 살아갈 수 있으려면,
우리 사회는 이들의 말에 어떻게 응답하고 어떻게 함께해야 하는가.
기억이 더 넓은 사회와 만날 때
올해 달라진 것은 교실만이 아닙니다.
지난해 국회와 지방자치단체, 도서관과 시민의 공간을 찾아갔던 전시는
올해 대한민국 안전산업박람회와 생명안전비엔날레를 비롯해
더욱 다양한 시민들이 모이는 현장으로 나아갑니다.
재난과 피해자 문제에 이미 관심을 가진 사람들뿐 아니라 안전을 기술과 산업의 문제로 고민하는 사람들,
다른 관심으로 행사를 찾았다가 우연히 작품 앞에 서게 된 시민들과도 만나고자 합니다.
이를 위해 센터는 더 많은 자원과 역량을 투입하고 여러 기관·단체와의 협력을 넓혀가고 있습니다.
전시의 규모를 키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피해자의 이야기가 기억되고, 더 많은 사람에게 닿고, 다시 사회의 질문이 될 수 있는 공간을 넓히기 위해서입니다.
기억을 안전의 기준으로
올해 전시를 둘러싼 사회적 조건에도 중요한 변화가 있었습니다.
세월호참사 이후 수많은 재난참사 피해자와 시민들이 오랫동안 염원해온
생명안전기본법이 제정되고 국민생명안전위원회가 출범했습니다.
이제 우리 사회에는 안전을 국가가 베푸는 시혜나 운에 맡겨진 조건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보장되어야 할 권리로 바라볼 수 있는 기준이 마련되었습니다.
다양한 재난과 안전사고의 피해자에게 어떤 기본적 권리가 보장되어야 하는지 살피고,
그것이 실제로 지켜지고 있는지를 점검할 제도적 토대도 생겼습니다.
그래서 올해 전시의 제목을 <기억, 안전 사회를 위한 이정표>라고 정했습니다.
기억은 과거를 되돌아보는 일에 머물지 않습니다.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잊지 않고,
피해자가 겪은 일을 사회의 경험으로 남겨 같은 고통이 반복되지 않도록 하는 일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기억은 더 안전한 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출발점이자 기준입니다.
생명안전기본법의 제정과 국민생명안전위원회의 출범 역시 안전사회의 완성을 뜻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새롭게 마련된 기준이 피해자의 실제 삶에서 어떻게 구현되는가입니다.
재난이 발생했을 때 피해자는 존엄한 시민으로 대우받고 있는가.
필요한 정보를 충분히 제공받고 있는가. 진실을 알고 책임을 물을 수 있는가.
애도하고 회복하며 자신의 삶을 다시 꾸려갈 수 있는가.
그리고 피해자의 경험과 목소리는 더 안전한 사회를 만드는 과정에 제대로 반영되고 있는가.
이번 전시의 작품들은 그 질문을 기억하게 하는 작은 이정표들입니다.
작품 속 한 사람의 삶을 따라가다 보면 재난은 한순간의 사고로 끝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묻게 됩니다. 우리는 무엇을 놓쳤는가. 그 사람에게 어떤 권리가 필요했는가.
같은 일이 되풀이되지 않기 위해 무엇을 바꾸어야 하는가.
그 질문이 전시장을 나선 뒤에도 오래 남기를 바랍니다.
피해자의 이야기를 안타까운 사연으로 기억하는 데 그치지 않고,
우리 사회의 안전을 돌아보고 바꾸는 기억으로 이어가 주시기를 바랍니다.
안전은 피해자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권리이며,
피해자의 경험은 우리가 더 안전한 사회로 나아가기 위해 반드시 기억해야 할 사회의 경험이기 때문입니다.
함께 세우는 이정표
세 해 동안 이 특별한 수업을 가능하게 해주신 재난피해자 여러분께 가장 먼저 깊은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자신의 아픈 경험을 다시 꺼내 청년들에게 건네주신 그 마음을 잊지 않겠습니다.
그 이야기를 진지하게 듣고 오래 톺아보며 작품으로 만들어준 청강문화산업대학교 학생들,
배움이 세상에 대한 질문과 응답으로 이어지도록 징검다리를 놓아주신 교수님,
그리고 각자의 자리에서 지식과 경험을 나누며 수업을 함께 만들어주신 전문가 여러분께도 깊이 감사드립니다.
또한 올해 전시가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힘과 자원을 보태고
기꺼이 함께해주신 여러 기관과 단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이 일을 준비해주신 모든 분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한 사람의 기억이 우리의 기억이 되고,
그 기억이 더 안전한 사회를 향한 이정표가 되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2026년 9월